개나리꽃 시 5
<나리나리 개나리/기형도, 개나리/김용락, 나리나리 개나리/홍수희, 개나리/손정모, 개나리/홍혜리>
소리 없이 꺽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나리나리 개나리/ 기형도>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컹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봄은 어김없이 다시 오고, 개나리가 다시 핀다는 사실...
<개나리/ 김용락>
봄은 온다
막을 수 없는 엄청난 무형의 힘으로 쳐들어오는
실핏줄 같은 산천의 봄을 따라 흐르다 보면
중동 천변
신흥부자들의 붉은 색 이층 벽돌집이 한껏 위엄을 부리는
사거리 부근의 지붕 낮은 봉산 희망원
재잘대는
원생들의 꿈처럼 노랗게 개나리 꽃망울은 벙글고
다짐받을 수 없는 약속인 양
희망원의 철망가시 위로는 겨울 내의가 누더기처럼 휘날린다
삼삼오오 줄넘기를 하는 아이들
배드민턴을 치는 아이
배드민턴공이 가벼운 깃을 날리며 봄바람 속으로 솟아오른다
알까, 저 애들은
배드민턴공처럼 우리들의 희망도
무작정 저렇게 솟아오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솟아오르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떨어진다는
그 어쩔 수 없음의 한계를
그러나 그 꼭지점에서 봄이 오고, 개나리가 다시 핀다는 사실을
잉여농산물
옥수수 빵가루와는 또 다른 사랑이 있다는 것을
나리나리 부르면 보일 것 같은 어릴 적 노란 나비 돌담에 와서 ~~
<나리나리 개나리/ 홍수희>
나리나리개나리,
청산협곡(靑山峽谷) 아닌 빌딩의 협곡(峽谷)에서 불러 본다
노래여 바람은 차고 날은 어둡다
어두운 영혼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혹여 보일 것 같은
나리나리 부르면 보일 것 같은
어릴 적 노란 나비 돌담에 와서
햇살같이 햇살같이 웃을 것 같은
베란다 쇠창틀에 웃을 것 같은
너무 많은 기억과 너무 많은 네 이름 한 자로 줄여
노래 부르면 새털이 날리듯 무거운 소음 걷히어 가고
사로잡힌 꿈 하나 사로잡힌 오오 그리움 하나
이마에 핏방울 뚝뚝 들어도,
나리나리개나리,
청산협곡(靑山峽谷) 아닌 빌딩의 협곡(峽谷)에서 불러 본다
노래여 노래 부르면 마른 장작처럼 마른 장작처럼 여윈 뼈
어느새 불 활활 타고 옆구리에 박혀버린
화살 한 촉은 투명한 그대 시선이 되어
나의 하루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리니
더 이상 내게는 권태가 없고
더 이상 내게는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 혹여 보일 것 같은
나리나리 부르면 보일 것 같은
너무 많은 기억과 너무 많은 네 이름
한 자로 줄여 부르면 부르면 거듭 부르면,
나리/ 손정모>
언 땅에 물기가 돈다
몇 달을 고행(苦行)했다.
너는 먹먹한 설움을 털어 내며
햇살이 적요로이 조는 양달에서
앙상한 몸뚱이로 기를 뿜어낸다
솔잎이 드러눕고 달빛이 일어선다
솔잎에 매달려 며칠 동안을
하얗게 떨며
들려주던 바람의 목소리
이제 넌
두렵더라도
몸을 열 때가 되었어
목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푸른 바람결에 떠밀려
아뜩한 현기증에 몸을 떨던 너
어느새 아랫도리의 힘이 풀리면서
펑펑펑
하늘을 향해 기포들처럼 터지는
샛노란 바람구멍
지상은 온통 금빛날개, 종소리 소리~~
<개나리/ 홍해리>
그대는
땅 속의 사금가루를 다 모아
겨우 내내
달이고 달이더니,
드디어
24금이 되는 어느 날
모두 눈감은 순간
천지에 축포를 터뜨리었다.
지상은 온통 금빛 날개
종소리 소리 …
순도 100%의 황홀
이 찬란한 이명이여.
눈으로 들어와
귀를 얼리는
이 봄날의 모순을
누구도 누구도 어쩌지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