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이문재,정호승

이문재 詩 (하)

머루랑 2009. 2. 27. 14:07

 <화전, 월광욕, 시월, 오래된 기도, 마음의 오지, 거울, 저물녘에 중얼거리다, 푸름 곰팡이>

 

 

 

 

 

화전//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월광욕//

 

달빛에 마음을 내다 널고

쪼그려 앉아

마음에다 하나씩 

이름을 짓는다

도둑이야!

낯선 제 이름 들은 그놈들

서로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마음 달아난 몸

환한 달빛에 씻는다

이제 가난하게 살 수 있겠다

 

 

 

 

 

 

 

 

 

 

 

시월//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문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마음의 오지//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거울//

 

모든 빛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유리창은 늘 차갑다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아서

거울은 모든것을 되비춘다

유리의 막힌 한쪽

거울의 뒤쪽

거울은 따뜻하지 않다

내 살아온 날들은

내 죽음이 함께 살아온 날들

이렇게 살아 있음의 뒤편이

바로 나의 죽음

거울의 배면

내가 죽어야 내 죽음도 죽는다

 

 

 

 

 

 

 

 

 

 

저물녘에 중얼거리다//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녘에

무관심해지다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만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푸른 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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