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이문재,정호승

이문재 詩 (중)

머루랑 2009. 2. 27. 14:18

  <농담, 노독,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길에 관한 독서, 마음의 독서,

   거미줄, 모든 눈물은 모든 뿌리로 모두 간다, 도보 순례자>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한다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리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길에 관한 독서//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마음의 지도//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댔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그러니까 다 다른 곳으로 달려갔더랬구나

연기만 그러니까 매캐했던 것이구나

 

 

 

 

 

 

 

 

 

 

 

거미줄//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모든 눈물은 모든 뿌리로 모두 간다//

 

혼자 눈물은 두 손에 받는다

손은 단지다

손은 깊어지고 싶어 운다

두 손은 또 울면서 길어져서

뿌리에 가서 닿고 싶어한다

몸이, 몸이 되고 싶어한다

 

손의 절망은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러나

손은 거개가 타인이다

무시로 손은 타인을 향한다

내 손은 내가 아닐 때가

많다, 너무 많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손이다

대중소비사회는 손에 달려 있다

손을 잘 간수해야 한다고

두 손 둘데를 시시각각

결정해야 몸이,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지독하게 외로워진 것이다

손이 내 몸 거죽을 긁는다
  
뿌리의 손들이 붉은 꽃 게워낸다

 

 

 

 

 

  

 

 

 

 

 

 

 

도보 순례자//

 

나 이제 돌아가리라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지리라

지그시 눈감으며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깡그리 무시하리라
  
그리하여 나 돌아가리라

등한시했던 몸의 변두리를 찾아

두 발에게 두 손에게 머리 숙이리라

때와 장소를 자백하고

20세기에 태어난 그 어린 이름들도 불리라
  
하여 나 어서 몸이리라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반응하리라
  
맛에 겸손하고

촉감에 민첩하며

육감에 충실하리라
  
나 몸이리라

오로지 몸으로 더운 몸이리라

그리하여 낯선 나

나에게로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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