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노독,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길에 관한 독서, 마음의 독서,
거미줄, 모든 눈물은 모든 뿌리로 모두 간다, 도보 순례자>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한다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리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길에 관한 독서//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마음의 지도//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댔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그러니까 다 다른 곳으로 달려갔더랬구나
연기만 그러니까 매캐했던 것이구나
거미줄//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모든 눈물은 모든 뿌리로 모두 간다//
혼자 눈물은 두 손에 받는다
손은 단지다
손은 깊어지고 싶어 운다
두 손은 또 울면서 길어져서
뿌리에 가서 닿고 싶어한다
몸이, 몸이 되고 싶어한다
손의 절망은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러나
손은 거개가 타인이다
무시로 손은 타인을 향한다
내 손은 내가 아닐 때가
많다, 너무 많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손이다
대중소비사회는 손에 달려 있다
손을 잘 간수해야 한다고
두 손 둘데를 시시각각
결정해야 몸이,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지독하게 외로워진 것이다
손이 내 몸 거죽을 긁는다
뿌리의 손들이 붉은 꽃 게워낸다
도보 순례자//
나 이제 돌아가리라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지리라
지그시 눈감으며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깡그리 무시하리라
그리하여 나 돌아가리라
등한시했던 몸의 변두리를 찾아
두 발에게 두 손에게 머리 숙이리라
때와 장소를 자백하고
20세기에 태어난 그 어린 이름들도 불리라
하여 나 어서 몸이리라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반응하리라
맛에 겸손하고
촉감에 민첩하며
육감에 충실하리라
나 몸이리라
오로지 몸으로 더운 몸이리라
그리하여 낯선 나
나에게로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