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이문재,정호승

이문재 詩 (상)

머루랑 2009. 2. 27. 14:40

  <저문 비, 사랑이 나가다, 봄편지, 사랑이 나가다(손 이야기), 촛불, 우리 밀

   어린 싹, 내 안의 감옥, 큰 꽃> 

  

 

 그믐밤보다 깊게 만나는 물방울의 맨 처음을 나는 듣는다 

  

 

 

저문 비//


저문 비 내리고

나는 듣는다

가문비나무 숲속

그믐밤보다 깊게 만나는 물방울의

맨 처음을 나는 듣는다 지나가버린 잠을

밟으며 잃어버린 발자국 소리를 건지며

저문 비를 곁에 둔다

오늘이 며칠일까 궁금하지 않던 날들을

저문 비에 젖게 하며

가문비나무 숲속

그믐밤의 흰 것보다 빛나던

그 밤의 파열을 한아름

나는 듣는다

 

 

 

 

 

 

 하르르 하르르 하류로 흐르는 꽃잎 꽃 이파리 이런 날..

  

 

 

봄편지//

 

하르르 하르르 하류로 흐르는

꽃잎 꽃 이파리 이런 날

기온이나 풍속 혹은 물 흐름처럼

내 마음도 어떻게 평균 같은 것을


좀 낼 수 없을까 싶어

죄스러움에서 벅차오름까지

마음의 근황을 죄다 내려놓아 보는 것인데

어? 어디에도 내 마음

줄곧 내 마음인 것 없네

상류에서 하류까지 수평선에서

구름 물방울에까지 이르는 둥그런 항심이 없네

끈 묶어둘 중심이 없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이 나가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의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싹을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우리 밀 어린 싹//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라는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다

점심 먹으러 갈 때마다 지나다니는 농업박물관
앞뜰에는 원두막에 물레방아까지 돌아간다
원두막 아래 채 다섯 평도 안 되는 밭에
무언가 심어져 있어서 파랬다
우리 밀, 원산지 : 소아시아 이란 파키스탄이라고 쓴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농업박물관 앞뜰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싹을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
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
똥짐 지던 그 시절이
미래가 되고 말았다
우리 밀, 아 오래된 미래

나는 울었다

 

 

 

 

 

 가장 큰 감옥은 내 안의 감옥, 낯익은 감옥 그곳..

 

 

  

  내 안의 감옥은//

 

     가장 큰 감옥은

     내 안의 감옥

     낯익은 감옥 그곳

     낯익어 설레임 사라진

 

     내 안의 감옥 그곳

     눈 닫아걸고 귀 연 지 오래

     아주 오래 이윽고 내 안이

     끔찍한 지옥임을 알았을 때

     등롱초 등롱 밝아지듯

     저마다 심지가 되기 시작한

     마음의 세포들 설레

     설레어서

 

     그래, 같이 살자꾸나

     어서 들어오너라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사랑이 나가다//

- 손 이야기 1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의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초의 촛불은 언제나 제 몸의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서 흔들리는 것이다.

 

 

 

촛불//

 

촛불은

자기 눈물의

자기 몸의 맨 위를 녹인 맑은 물의

한 가운데서 피어난다

 

촛불은 꽃이다

 

촛불의 심지는

언제나 자기의 맨 꼭대기다

초의 촛불은 언제나

제 몸의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서 흔들리는 것이다

 

촛불은 제 몸에 뿌리 내린 꽃이다

 

그리하여 촛불은 언제나 낮아진다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어나

가장 낮은 곳에서 제 몸과 함께 사라진다

사라질 때 촛불은

화악 -마지막으로 불타오른다

다 살라버리는 것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못한다.

 

 

 

 

 

  큰 꽃//
                                          

꽃들은 내려놓고 죽을 힘을 다해 피워놓은
꽃들을 떨구어 놓고
봄나무들은 서서히 연두빞으로 돌아간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나는 봄나무들의 이름을 잊어버린다.
산수유 진달래 산벗 라일락 철쭉
꽃 진 봄나무들은 신록일 따름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못한다.
꽃이 지면 나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진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나무가 저마다 더 큰 꽃이라는 사태를
활활 타오르는 푸숲의 화엄을
나는 눈뜨고도 보지 못한 것이다.

꽃은 지지않는다.
꽃이 지면 나무들은
온몸으로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가 꽃이다.


 

 

 

 

 

 

 

 

                시인.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 제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가 있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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