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나무/ 안도현, 모과/ 유창섭, 모과나무/ 권복례>
<모과나무/ 안도현>
모과나무는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갈아입을 팬티도 없는 것이 무얼 믿고 저러나?
나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과나무, 그가 가늘디가는 가지 끝으로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왔을 것이다
<모과/ 유창섭>
밤마다
북두칠성 내려앉아 반짝이던
가지 끝에서
神話가 익는다
몇 백 광년의 거리를 날고 날아서
보내 온
은밀한 이야기 풀어내다가
그제야 깨달은 마음
노랗게 익었을까
한 세상 길게 살아도
몇 백번 더 살아야 만날지 모를
인연의 끈
달빛에 묶어 놓고
멋대로 살아 온 길 뉘우치며
오늘에야 풀어놓는
告白
이제라도 돌아서면
그 마음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
<모과나무/ 권복례>
서리가 하얗게 내리더니 늙은 모과나무에 애처로이 달려 있던 모과 한 알, 달력 숫자 위 어머니 칠순 날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데 뚝 떨어져 버렸다 ‘에미야, 한나네가 즈이 집으로 이사 간다는구나.
’ 봄이면 늙은 모과나무에 수백 개의 하얀 비단꽃의 화려함도 잠시, 비바람 꽃샘추위에 의지하지 못하고
몇 개만 남아 모과알 키워내더니 밤새 설쳐 눈동자에 실핏줄 서게 하는 아열대 기후에 못 이겨 꼭지가 무르고
마르고 끝내 과육 맛 완숙시켜 주는 태양열 받아먹지도 못하고 떨어져 제 구실도 못하고, 모과 한 알 덩그라니
매달려 있다가 그 하나마져도 오늘 된서리에 못 이겨 뚝 떨어지면서 내 가슴을 친다.
어머니 홀로 두고 육남매 저희들 둥지로 떠난 후에 어머니는 무엇으로 버팀목 만드시려나
'<詩 휴게실> > 봄, 여름 詩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끗한 슬픔 (유재영) (0) | 2009.05.16 |
---|---|
봄비 詩-4 (0) | 2009.05.11 |
입하 (곽효환) (0) | 2009.05.06 |
모란 (이우걸) (0) | 2009.05.06 |
낙화유수 (윤재철) (0) | 2009.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