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도종환,안도현,김용택

도종환의 여름,가을 詩

머루랑 2008. 12. 19. 15:02

 

<봉숭아// 여름 한철// 어떤 마을// 칸나꽃밭// 개구리 소리// 쓸쓸한 풍경// 가을 사랑// 가을밤// 낙엽// 아무도 없는 별// 저녁 무렵// 시든 국화// 다시 가을// 억새>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봉숭아//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여름밤 깊고 깊어 근심도 깊은데 먼 마을의 등불도 흔들리다 이울고..

 

 

 

 

여름 한철//

동백나무 묵은잎 위에
새잎이 돋는 동안
아침 창가에서 시를 읽었다

난초잎이 가리키는 서쪽 산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바로 세우지 못한 나랏일에 마음 흐렸다

백작약 뿌리를 달여 먹으며
견디는 여름 한철

작달비 내리다 그친 뒤에는
오랜 해직생활에 찾아온 병은
떠날 줄을 몰랐다

여름밤 깊고 깊어 근심도 깊은데
먼 마을의 등불도 흔들리다 이울고
띠구름 속에 떴다 지는 까마득한 별 하나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어떤 마을//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꽃밭

 

 

 

 

칸나꽃밭//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진다

네 사랑을 보아라
네 사랑의 밀물진 꽃밭에
서서 보아라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꽃밭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칠흑 어둠에 덮인 산골짝 다락논 옆을 지나는데 개구리 소리 천지에 가득하다

 

 

 

 

개구리 소리//

칠흑 어둠에 덮인 산골짝 다락논 옆을 지나는데
개구리 소리 천지에 가득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시간

개구리 소리

칠흑 어둠에 덮인 산골짝 다락논 옆을 지나는데
개구리 소리 천지에 가득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시간 속에 잠기어 목만 내놓은 채
개구리들이 이렇게 울어대는 건
막막함 때문이리라
너도 혼자지 너도 무섭지 이렇게 서로에게 물으며
그래 그래 그래 그래 대답하는 소리 가득하다
어둠 속에서 한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외로움을
이기려는 소리 너도 아직 살아 있구나
너도 그렇게 견디고 있구나
그래 그래 서로 대답하며 울음의 긴 끈으로
서로를 묶어놓는 소리 밤새도록 가득하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쓸쓸한 세상//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가을 사랑//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불을 끄고 누워도 꺼지지 않는 가을밤 등잔불 같은 그대 생각

 

 

 

가을밤//

그리움의 물레로 짓는
그대 생각의 실타래는
구만리 장천을 돌아와
이 밤도 머리맡에 쌓인다.

불을 끄고 누워도
꺼지지 않는
가을밤 등잔불 같은
그대 생각

해금을 켜듯 저미는 소리를 내며
오반죽 가슴을 긋고 가는
그대의 활 하나
멈추지 않는 그리움의 활 하나

잠 못 드는 가을밤
길고도 긴데
그리움 하나로 무너지는 가을밤
길고도 긴데

 

 

 

 

 

 

  흔적없이 헤어지자 오늘 또다시 떠나는 수천의 낙엽! 낙엽...

 

 

 

 

낙엽//

헤어지자
상처 한 줄 네 가슴 긋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자

수없이 헤어지자
네 몸에 남았던 내 몸의 흔적
고요히 되가져가자

허공에 찍었던 발자국 가져가는 새처럼
강물에 담았던 그림자 가져가는 달빛처럼

흔적없이 헤어지자
오늘 또다시 떠나는 수천의 낙엽
낙엽

 

 

 

 

  

 

   아무도 없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아무도 없는 별//

아무도 없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달맞이꽃이 피지 않는 별에선
해바라기도 함께 피어나지 않고
폭풍우와 해일이 없는 곳에선
등 푸른 물고기도 그대의 애인도
살 수 없다
때로는 화산이 터져 불줄기가
온 땅을 휩쓸고 지나고
그대를 미워하는 마음 산을 덮어도
미움과 사랑과 용서의 긴 밤이 없는 곳에선
반딧불이 한 마리도 살 수 없다
때로는 빗줄기가 마을을 다 덮고도 남았는데
어느 날은 물 한 방울 만날 수 없어
목마름으로 쓰러져도
그 물로 인해 우리가 사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낙엽이 지고 산불에
산맥의 허리가 다 타들어가도
외로운 긴 밤과 기다림의 새벽이 있어서
우리가 이 별에서 사는 것이다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저녁 무렵//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시든 국화//


시들고 해를 넘긴 국화에서도 향기는 난다
사랑이었다 미움이 되는 쓰라린 향기여
잊혀진 설움의 몹쓸 향기여

                                          

 

 

 

 

                      

다시 가을//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은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저녁호수의 물빛이 억새풀빛인 걸 보니 가을도 깊었습니다

 

 

 

  

 

 

억새//


저녁호수의 물빛이 억새풀빛인 걸 보니
가을도 깊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어머니,
억새풀밖에 마음 둘 데가 없습니다
억새들도 이젠 그런 내 맘을 아는지
잔잔한 가을햇살을 따서
하나씩 들판에 뿌리며 내 뒤를 따라오거나
고갯마루에 먼저 와 여린 손을 흔듭니다
저도 가벼운 몸 하나로 서서 함께 흔들리는
이런 저녁이면 어머니 당신 생각이 간절합니다
억새풀처럼 평생을 잔잔한 몸짓으로 사신
어머니, 올 가을 이 고개를 넘으면 이제 저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저무는 길을 향해
걸어 내려가려 합니다
세상의 불빛과는 조금
거리를 둔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고 힘이 넘치는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지라
어머니를 크게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였지만
제가 가슴 아파하는 것은
어머니의 평범한 소망을
채워드리지 못한 점입니다
험한 일 겪지 않고 마음 편하고 화목하게만
살아달라는 소망
아프지 말고 아이들 잘 키우고 남에게 애먼 소리
듣지 말고 살면 된다는 소박한 바람
그중 어느 하나도 들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험한 길을 택해 걸었기 때문에
내가 밟은 벼룻길 자갈돌이
어머니 가슴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수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드린 것은 어머니를 벌판 끝에 세워놓고
억새같이 떨게 만든 세월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점점 사위어가는데
다시 가을이 깊어지고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져
우리가 넘어야 할 산 너머엔 벌써
겨울 그림자 서성댑니다
오늘은 서쪽 하늘도
억새풀밭을 이루어 하늘은
억새구름으로 가득합니다
하늘로 옮겨간 억새밭 사잇길로 어머니가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는 게 보입니다
고갯마루에 앉아 오래도록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하늘에서도 억새풀이 바람에 날려 흩어집니다
반짝이며, 저무는 가을햇살을 묻힌 채
잠깐씩 반짝이며
억새풀, 억새풀잎들이,

 

 

 

 

 

           

                  도종환

 

출생 - 1954년 9월 27일  

출신지 - 충청북도 청주

직업 - 시인
학력 - 충남대학교대학원

데뷔 -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 시 '고두미마을에서' 발표

 

경력 -
2008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2006년 7월 제4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수상 - 
2006년 거창평화인권문학상

2006년 올해의예술상 문학부문

 

위키백과 -

도종환(1954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충북 청주에서 출생하였고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상하였다.

시집에 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산문집에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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