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도종환,안도현,김용택

도종환의 겨울詩

머루랑 2008. 12. 19. 15:14

 

 <눈 덮인 새벽// 무심천// 눈 내리는 벌판에서// 폭설// 눈 내리는 길// 겨울나기//

   동안거// 빈 가지// 틈// 생애보다 긴 기다림> 

 

 

 

눈 덮인 새벽//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놓고 새벽은
산허리로 물러나 앉은 채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헐벗은 나뭇가지도 텅 빈 들판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고운 풍경으로 바꾸어놓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는 초겨울 새벽에는
나도 조건 없이 남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 눈 덮인 들판처럼 넓고 깨끗해져
그러는 건 아니고 지난날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발자국을
함박눈이 밤새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끄럽게 돌아선 골목길
있어야 할 어려운 자리를 지키지 않고
내내 마음 무겁던 나날들과
지키지 못한 언약들도
눈처럼 다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 많이 용서해 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지난가을 풀벌레들 사랑의 음성은 전해주고
몸을 가려준 풀숲처럼 나도 그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것들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이 아침 내가 많이 너그러워져서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내겐 강물 같고 남에겐 서릿발 같은
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지워주고 싶습니다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저 눈처럼
덮어주는 일이 풍요로운 모습이 되고
용서가 빛나는 풍경이 되는 것처럼

 

 

 

 

 

 

 

 

무심천//

한 세상 사는 동안
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욕심이라서
인연이라서
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
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
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
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
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어긋나고 어긋나는 사랑의 매듭
다 풀어 물살에 주고
달맞이꽃 속에 서서 흔들리다가 돌아보시게
돌아서는 텅 빈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
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욕심 다 버린 뒤
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눈 내리는 벌판에서//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발자국 소리만이 외로운 길을 걸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몸보다 더 지치는 마음을 누이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깊어지고 싶다
둘러보아도 오직 벌판
등을 기대어 더욱 등이 시린 나무 몇그루뿐
이 벌판 같은 도시의 한복판을 지나
창 밖으로 따스한 불빛 새어 가슴에 묻어나는
먼 곳의 그리운 사람 향해 가고 싶다
마음보다 몸이 더 외로운 이런 날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터져오르는 이름 부르며
사랑하는 사람 있어 달려가고 싶다.

   

 

 

 

 

 

 

폭 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 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려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속
빈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에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눈 내리는 길//

당신이 없다면 별도 흐린 이 밤을
내 어이 홀로 갑니까
눈보라가 지나가다 멈추고 다시 달려드는 이 길을
당신이 없다면 내 어찌 홀로 갑니까
가야 할 아득히 먼 길 앞에 서서
발끝부터 번져오는 기진한 육신을 끌고
유리알처럼 미끄러운 이 길을 걷다가 지쳐 쓰러져도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기로 한
이 길을 함께 가지 않으면 어이 갑니까
스쳐지나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이 함께 있어서 내가 갑니다
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당신이 그 눈발을 벗겨주어
눈물이 소금이 되어 다시는 얼어붙지 않는 이 길
당신과 함께라면 바람과도 가는 길
당신과 함께라면 빗줄기와도 가는 길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혼미하여 뒹굴다가도
머리칼에 붙은 눈싸락만도 못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당신이 함께 있으므로 오늘 이렇게 나도 갑니다
눈보라 치다가 그치고 다시 퍼붓는 이 길을
당신이 있어서 지금은 홀로도 갑니다

 

 

 

 

 

 

 

 

 


겨울나기//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동안거//


장군죽비로 얻어맞고 싶다
눈 하나 제대로 뜨지 못하고 어둡게 앉아 있는
내 영혼의 등짝이 갈라지도록

안락의 답답한 표피 하나 못 걷고
유혹의 그 알량한 속껍질 속으로 기어드는
정신을 도래방석에 얹어 누가
도리깨로 두들겨주었으면 싶다

물을 맞고 싶다 수직의 날카로운 폭포를
칼날 같은 물끝으로 누가 이 어리석은 육신을
얼음처럼 다 드러나 보이게
꿰뚫고 지나가주었으면 싶다

 

 

 

 

 

 

 

 빈 가지//

잎진 자리에 나뭇잎 있던 흔적조차 없다
두고 떠나온 자리에 이젠 내 삶의 흔적
흘린 땀방울 하나 자취조차 없다
누구도 서로에게 확실한 내일에 대해
말해줄 수 없는 시대
돌아보면 너무도 많은 이가
벌판이 되어 쓰러져 있는 저녁
얼음을 만진 듯한 냉기만이 얼굴을 쓸고 가는데
우리 생의 푸르던 날은 다시 오는 걸까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긴 겨울
잡목덤불 헤쳐 새 길을 내야 하는 이 늦은 시각에
다시 등을 기대고 바라보는 나무의 빈 가지
그러나 새 순 새 가지는 잎 진 자리에서
다시 솟는 것임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그렇게 나무들이 견디며 살아왔듯
그때까지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는

 

 

 


 

 

 

 

 틈//


서재의 불을 끄고 응접실 스위치도 내리고
빠알간 점 하나 홀로 조용히 뜨겁던 전축의 불도 눌러 끄고
첼로의 낮은 음도 함께 끄고 돌아와 안방 장지문을 닫는다

닫고 끄고 여미고 습관처럼 그 안에 자신을 가두고
안녕 안녕히 지켜온 조심스런 하루

장지문을 닫다가 길게 금이 간 문종이를 본다
창틀 아래에서 끝까지 늘 팽팽히 당겨져 있던 문종이가
날카롭게 찢어져 있다 손이나 무슨 물건으로 찢은 흔적 아니라
문을 닫던 충격이나 그 충격을 타고 달려가던
소리가 갈라놓은 것 같다

시간 시간 긴장하며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반듯한 삶이
그 팽팽함으로 인해 찢어지는 경우도 있구나
조심조심 닫고 차단하고 경계하던 삶을
스스로 견디지 못해 하는구나
틈이 없는 삶에 빈틈을 열어놓고 바람도 불러놓고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는구나

 

 

 

 

 

 

 

 

 

 

 

 

생애보다 긴 기다림//

밤 사이에 산짐승 다녀간 발자국 밖에 없는데
누가 오기라도 할 것처럼
문 앞에서 산길 있는 데까지
길을 내며 눈을 쓸었다
이제 다시는 당산나무를 넘어오는 발소리를
기다리지 말자 해놓고도 못다 버린 게 있는 걸까
순간 순간 한 방울씩 녹아내린 내 마음도 흘러 고이면
저 고드름 같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동안
종유석 같은 고드름이 댓돌 위에 떨어져 부서진다
기다리는 것 오지 않을 줄 늦가을 무렵부터 알았다
기다림이란 머리 위에 뜨는 별 같은 것인지 모른다
내가 내게 보내는 화살기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길이 눈에 덮여 지워지고
오직 내 발자국만이 길의 흔적인 눈 속에서
이제 발소리를 향해 열려 있던 귀를 닫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날들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천천히 지워진 다음날 새벽
아니 그 새벽도 잊어진 먼 뒷날
창호지를 두드리는 새벽바람 소리처럼 온다 해도
내 기다림이 완성되는 날이 그날쯤이라 해도
나는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접은 것은 어쩌면 애타는 마음이나
조바심인지 모르겠으나
생애보다 더 긴 기다림도 있는 것이다
기다림을 생애보다 더 길게 이 세상에
남겨놓고 가야 하는 생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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