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도종환,안도현,김용택

도종환의 봄詩 (상)

머루랑 2008. 12. 19. 23:28

                     <저무는 꽃잎// 봄산// 어린이 놀이터// 산경//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산벚나무// 

                  나뭇잎 꿈// 봄비// 배롱나무// 꽃 지는 날>

 

 

저무는 꽃잎//

가장 화려하게 피었을 때
그리하여 이제는 저무는 일만 남았을 때

추하지 않게 지는 일을
준비하는 꽃은 오히려 고요하다

화려한 빛깔과 향기를
다만 며칠이라도 더 붙들어두기 위해
조바심이 나서
머리채를 흔드는 꽃들도 많지만

아름다움 조금씩 저무는 날들이
생에 있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아름다운 날에 대한 욕심 접는 만큼
꽃맺이 한치씩 커오른다는 걸
아는 꽃들의 자태는
세월 앞에 오히려 담백하다

떨어진 꽃잎 하나
가만히 볼에 대어보는
봄날 오후

 


 

 

 

 

 

 봄산//

거칠고 세찬 목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것 아니다


눈 부릅뜨고 악써야 정신이 드는 것 아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몸짓들 모여


온 산을 불러 일깨우는 진달래 진달래 보아라


작은 키 야윈 가지로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철쭉꽃 산철쭉꽃 보아라

 

 

  

 

 

 

 

어린이 놀이터//


어린이 놀이터에 개나리꽃이 진하게 피었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없고
아이들이 금그어놓고 놀다 간
사방치기 그림만 땅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 앞에 서서 폴짝 뛰어보려다
멈칫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다 폴짝 폴폴짝 뛰어 건넜다
개나리꽃이 머리를 흔들며
깔깔대고 웃다가 꽃잎 몇개를 놓친다
햇살이 위 꽃잎에서 아래 꽃잎 더미 위로
주르르 미끄러져내린다
여기서 오 분만 걸어가면
쫓겨난 학교가 있다
이 봄이 지나면 못 돌아간 지 꼭 여덟 해가 된다
걸어서 오 분이면 가는 학교를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그리움도 설렘도 없이 날이 저문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얼굴엔 검버섯 피는데


눈물도 고통도 없이 밤이 온다


빗방울 하나에 산수유 피고 개나리도 피는데


물결도 파도도 없이 내가 저문다


 

 

 

 

 

산벚나무//

아직 산벚나무 꽃은 피지 않았지만
개울물 흘러내리는 소리 들으며
가지마다 살갗에 화색이 도는 게 보인다
나무는 희망에 대하여 과장하지 않았지만
절망을 만나서도 작아지지 않았다
묵묵히 그것들의 한복판을 지나왔을 뿐이다
겨울에 대하여
또는 봄이 오는 소리에 대하여
호들갑떨지 않았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경박해지지 않고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요란하지 않았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갈 줄 알았다
절망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듯
희망도 무서워할 줄 알면서

 

 

 

 

  

 

 

 

축복//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 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 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나뭇잎 꿈//

나뭇잎은 사월도 청명과 곡우 사이에
돋는 잎이 가장 맑다
연둣빛 잎 하나하나가 푸른 기쁨으로
흔들리고 경이로움으로 반짝인다
그런 나뭇잎들이 몽글몽글 돋아나며 새로워진 숲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루는 산은
어디를 옮겨놓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혁명의 꿈을 접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어서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꼭 사월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으면 싶다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가지마다 빛나는 창을 들어
대지를 덮었던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환호하듯
우리도 실의와 낙망을 걷어내고
사월 나뭇잎처럼 손사래 쳤으면 좋겠다
풋풋한 가슴으로, 늘 새로 시작하는 나뭇잎의 마음으로

 

  

 

 

 

                                                                        

                                                                     봄비//

                   새벽에 기관총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두두두두두 지붕을 때리는 소리 연못 위로 방울붕울 구멍을 내며

                   쏟아지는 소리 나뭇단 위에도 다릿돌에도 맑은 총알의 파편이 튀었다 대나무들은 머리채를 풀어 흔들며 등뼈로

                   총알을 튀겨내고 냉이며 쑥이며 풀들은 피할 새도 없이 꼼짝 못 한 채 총을 맞고 있었다 겨울 적막하고 건조한

                   날들을 이렇게 끝장내겠다는 듯이 다연발 자동소총을 쉼없이 쏘아댔다.


                   총소리에 놀라 깨어 일어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멧비둘기 산꿩이 오랜만에 총소리의 서늘한 습도에 목청을 씻었고

                   총소리 잠시 잦아드는가 싶으니 다람쥐가 꼬리를 치켜들고 쪼르르 달려나와 연못물을 마시며 몸을 털었다.


                   어제는 이십몇 년 만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이십 몇 년 전의 목소리 태연한 듯 다시 잠든 열망을 깨우는

                   목소리 나는 불이 켜지지 않는 창을 올려다보며 밤을 새웠다 그녀는 그날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새벽은 그만

                   돌아가라고 나를 떠밀었다 새벽 때문이 아니라 결국 새벽이 오고 말았다는 난감함에 밀려서가 아니라 귀대날짜가

 

                   정해져 있었으므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밤새 나를 덮었던 어둠은 지워지고 내 등뒤에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어둠과

                   함께 돌아왔다 돌아와 메마른 봄언덕을 향해 다연발 자동소총을 갈겼다 아카시아 뿌리가 찢어져 허옇게 드러나고

                   두두두두두 총소리의 끝에 이어지는 침묵의 순간들이 몹시 길어 그 사랑은 옛사랑이 되고 말았다 소중하여 아끼고

 

                   아끼다 날려버린 사랑의 유탄 사랑은 거기서부터 마지막 몇 개의 탄피처럼 말없음표를 툭 툭 찍으며 떨어져 세월

                   속에 묻혔다 저예요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장 뜨거운 날들이 속절없이 저 혼자 지나가고 묻히고 지워졌다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끝에서 봄비가 쏟아지고 태연하게 돌아와 풀들을 깨우고 두두두두두 기관총을 난사하고...

 

 

 
 

  

 

배롱나무//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꽃 지는 날//

슬프지만 꽃은 집니다
흐르는 강물에 실려 아름답던 날은 가고
바람 불어 우리 살에도 소리 없이 금이 갑니다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 살고자 하던 그대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대에게 꽃 지는 날이
찾아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대 이기고 지고 또 지기 바랍니다
햇살로 충만한 날이 영원하지 않듯이
절망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지를 하늘로 당차게 뻗는 날만이 아니라
모진 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찢겨진 꽃들로 처참하던 날들이
당신을 더욱 깊게 할 것입니다
슬프지만 피었던 꽃은 반드시 집니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도 아름다운 삶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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