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도종환,안도현,김용택

도종환의 사랑詩(상)

머루랑 2008. 12. 20. 22:05

                <당신은 누구 십니까// 별 아래 서서// 만들 수만 있다면// 사랑을 잃은 그대에게// 혼자 사랑//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꽃다지// 흉터// 사랑업// 병//

                 희망// 나리소// 섬// 빈 방>

 

                   

 

당신은 누구십니까//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개 햇살을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날 몇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영월 판운리 섶다리>

 

 

별 아래 서서//

별 하나 흐르다 머리 위에 머뭅니다
나도 따라 흐르다 별 아래에 섭니다
이렇게 마주보고 섰어도
늘상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함께 사랑하고 기뻐한 시간보다
헤어져 그리워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만났던 시간은 짧고
나머지는 기다리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어느 하늘 어느 땅 아래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떠나간 마음들 그리워 별만 바라봅니다

 

 

 

 


                                           <해바라기꽃>

 

 

만들 수만 있다면//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남길 수만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며 삽시다

가슴이 성에 낀 듯 시리고 외로웠던 뒤에도
당신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무참히 짓밟히고 으깨어진 뒤에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사나운 바람 속에서 풀잎처럼 쓰러졌다가도
우두둑 우두둑 다시 일어섰습니다

꽃 피던 시절의 짧은 기쁨보다
꽃 지고 서리 내린 뒤의 오랜 황량함 속에서
당신과 나는 가만히 손을 잡고 마주서서
적막한 한세상을 살았습니다
돌아서 뉘우치지 맙시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온 뒤에도 후회하지 맙시다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소라껍질의 노래>

 

사랑을 잃은 그대에게//

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했고 곁에 있었습니다
저녁노을의 그 끝으로 낙엽이 지는 것을 바라보고 서 있는
당신의 그림자 곁에 서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바람 같은 것임을
저는 생각합니다
웃옷을 벗어 어깨 위에 걸치듯
견딜 수 없는 무거움을 벗어 바람 속에 걸치고
어두워오는 들 끝을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저는 끝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랑을 잃은 그대여
당신 곁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신 곁에 없어도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별빛 하나쯤은 늘 사랑하는 이의
머리 위에 떠있듯
늦게까지 저도 당신의 어디쯤엔가 떠 있습니다
더 늦게까지 당신을 사랑하면서
비로소 나도 당신으로 인해 깊어져 감을 느낍니다
모든 이들이 떠난 뒤에도 저는 당신을 조용히 사랑합니다
가장 늦게까지 곁에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수크령>

 

혼자 사랑//

혼자서만 생각하다 날이 저물어
당신은 모르는 채 돌아갑니다
혼자서만 사랑하다 세월이 흘러
나 혼자 말없이 늙어갑니다
남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게
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같습니다

 

 

 


 

                                                <설악산 앵초>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운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 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늘 한복판으로 달아오르며 가는 태양처럼
한번 사랑하고 난 뒤
서쪽 산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노을처럼
사랑할 줄은 몰랐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면서 얼지 않아
골짝의 언 것들을 녹이며 가는 물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인데
제 사랑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둔 숲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닮아 얼굴이 따라 닮는 오래 묵은 벗처럼
그렇게 살며 늙어 가는 일인데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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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바람 한 줄기에도 살이 떨리는
이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이라고
내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처음 돋는 풀 한 포기보다 소중히 여겨지지 않고
민들레만큼도 화려하지 못하여
나는 흙바람 속에 조용히
내 몸을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안 뒤부터는
지나가는 당신의 그림자에
몸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고
건넛산 언덕에 살구꽃들이
당신을 향해 피는 것까지도 즐거워했습니다

내 마음은 이제 열을 지어
보아주지 않는 당신 가까이 왔습니다
당신이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로 흘러오리라 믿으며
다만 내가 당신의 무엇이 될까만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이름이 없는 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너무도 가까이 계심을 고마워하는
당신으로 인해 피어 있는 꽃입니다

 

 

 

 

 

 


            

 

흉터//

한 번 크게 앓고 난 뒤부터
이 상처
지워지지 않아요

한때의 칼자국
내 살 깊은 곳에 박혀서
오래도록 남아 있어요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상처는 상처대로 안고
흉터는 흉터대로 남은 채
이렇게 살고 있어요

세월은 흐르고
흉터는 지워지지 않아도
잊은 듯 살고 있어요

 

 

 

 

 

 

                                         <미국 쑥부쟁이꽃>

 

 사랑업//

이 세상에는 저만 모르는 채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저만 모르는 채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동안
제가 불을 붙이고
창을 열어 꺼뜨린 촛불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쌓은 선업과 악업이
사랑과 미움으로 자라는 동안
저만 모르는 채 떴다 지는
별 몇 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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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마음속 불꽃이
병이 된다
가슴속 북풍이
병이 된다

불 같은 그리움
얼음 같은 외로움이
병이 된다

지나온 내 생애의
발자국마다
나로 인해 내린 비가
병이 되어 고인다

불 타며 불 타며
병이 된다
바람 불어 바람 불어
병이 된다

 

 

 


 

                                             <골쇄보> 


희망//

그대 때문에 사는데
그대를 떠나라 한다

별이 별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내게 오는 그대를
꽃이 꽃에 닿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대를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고
사람들은 내게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돌아섰듯이
알맞은 시기에 그대를 떠나라 한다

그대가 있어서
소리없는 기쁨이 어둠속에 촛불들처럼
수십개의 눈을 뜨고 손 흔드는데

차디찬 겨울 감옥 마룻장 같은 세상에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
한 장의 얇은 모포 같은 그대가 있어서
아직도 그대에게 쓰는 편지 멈추지 않는데

아직도 내가 그대 곁을 맴도는 것은
세상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 사는 동네와 그 두터운 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모든 아궁이가 스스로 불씨를 꺼 버린 방에 앉아
재마저 식은 질화로를 끌어안고
따뜻한 온돌을 추억하는 일이라 한다

매일 만난다 해도 다 못 만나는 그대를
생에 오직 한번만 만나도 다 만나는 그대를

 

 

 

 

 

 

                                               <북한강변의 여름>

 

나리소//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이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의 할배바위>

 

섬//

그대 떠나고 난 뒤 눈발이 길어서
그 겨울 다 가도록 외로웠지만
그대가 곁에 있던 가을 햇볕 속에서도
나는 내내 외로웠다

그대가 그대 몫의 파도를 따라
파도 속 작은 물방울로
수평선 너머 사라져간 뒤에도
하늘 올려다보며 눈물 감추었지만

그대가 내 발목을 감으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이었을 때도
실은 돌아서서 몰래 아파하곤 했다

그대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도 어쩌지 못한
다만 내 외로움
내 외로움 때문에 나는 슬펐다

그대 떠나고 난 뒤
가을 겨울 봄 다 가도록 외로웠지만
그대 곁에 있던 날들도
내 속에서 나를 떠나지 않는 외로움으로
나는 슬펐다

 

 

 

 

 

 

                                               <청간정에서 바라보는 동해>

       

섬//

당신이 물결이었을 때 나는 언덕이라 했다.
당신이 뭍으로 부는 따스한 바람이고자 했을 때
나는 까마득히 멈추어 선 벼랑이라 했다
어느 때 숨죽인 물살로 다가와
말없는 바위를 몰래몰래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다만 용서하면서 되돌아갔었노라 했다
언덕뿐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살았다 했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갗에 배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파도를 토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 밀려가는 썰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가 있었다
단 한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 놓고 있었다.

 

 

 

 

 

 

                                                <설악산 십이선녀탕의 복숭아탕>

 

 

 

 

빈 방//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먼 산이 어둠을 천천히 빨아들이는 것이 보일 때
저녁하늘이 어둠의 빛깔을 몸 가득 머금는 것이 보일 때
늘 가던 길에서 내려 샛길로 들고 싶다
어디 종일 저 혼자 있던 빈 방이 나를 좀 들어오도록
허락해주면 좋겠다
적막함이 낯설음을 말없이 받아주는 방
적막의 서늘한 무릎을 베고
잠시 누워 있게 해주면 좋겠다
그 동안 살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였으므로
말없이 입을 닫고 있어도 불편해하지 않고
먼저 지쳐 쓰러진 적이 있던 그가
오늘 지친 모습으로 들어온 하루치의 목숨을 위해
물 끓이는 소리를 들려주면 좋겠다
처음엔 모두들 이렇게 어색한 얼굴로
주뼛거리기도 하다가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므로
문 밖으로 천천히 내려오던 어둠이
멋쩍어하는 우리의 얼굴을 잠깐씩 가려주기도 하고
우리가 늘 타향을 전전하며 살고 있으므로
고향을 너무 멀리 떠나왔으므로
고향이 어딘지 묻는 것만으로도 말문이 트이고
비슷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 하나 추억처럼
꺼내놓아도 서로를 즐겁게 긍정하고
내 몸을 꽁꽁 묶으며 나를 긴장시키는 게 일이던
끈들을 느슨하게 풀고
비슷한 사투리만으로도 익숙한 입맛을 만나는 저녁시간
몇 잔의 편안함이 술향기로 번져오는
순간 순간을 나누어 마시며
웃음이 번져가는 사람 하나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
어둠 속에서 만나는 객창감이 좋고
낯선 시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른팔로 팔베개를 하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잠이 들면
잠시 사라수나무 그림자 몸에 와 일렁이고
내 겉옷을 들어 잠든 나를 덮어주는
이름 모르는 사람 하나 곁에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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