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눈발이라면, 연애 편지, 저물 무렵, 찬밥, 사랑한다는 것, 그대에게 가고 싶다, 빈 논,
모닥불, 똥차, 벽시5, 금강 하구에서, 청진여자, 새벽밥, 풍산국민학교, 낙동강>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가을이 되면 찬밥은 쓸쓸하다 찬밥을 먹는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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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
가을이 되면 찬밥은 쓸쓸하다
찬밥을 먹는 사람도
쓸쓸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찬밥이었다
사랑하는 이여
낙엽이 지는 날
그대의 저녁 밥상 위에
나는
김 나는 뜨끈한 국밥이 되고 싶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했지
저물 무렵//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 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 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 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 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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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연애 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할 그리움이여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 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속에서도 썼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그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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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 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해 뜨는 아침에는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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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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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혹혹 입김을 하늘에 불어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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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차//
두어 달에 한 번씩 학교에 똥차가 온다 햇볕이 변소 지붕에 골고루 널린 날을 택해 부릉부릉 운동장을 힘차게 질러온다 개도 안 먹는다는 선생 똥을 교과서나 공책 찢어 쓰윽 닦은 아이들 똥을 빨대로 콜라 빨 듯 시원히 바닥낸다 수업시간에도 냄새가 교실을 적시지만 우리 어디 제 코만 싸잡을 일이다냐 비우면서 그리하여 가득 채우는 일 대명천지에 똥차는 와서 진정 참다운 일 가르쳐주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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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 5//
우리 나라 모닥불 근처에는 사람이 있다
살아서 모여 있다 등짝은 외롭고 캄캄해도 그 가슴이 화끈거리는
허리에 옷자락을 당겨 감으며, 성큼 강물은 떠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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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하구에서//
시도 사랑과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 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하나로 부둥켜안고 마침내 유장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 서해 속으로 발목을 밀어 넣는 강물은 반역이 사랑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한꺼번에 보여줄 테니까 장항제련소 굴뚝 아래까지 따라온 산줄기를 물결로 어루만져 돌려보내고 허리에 옷자락을 당겨 감으며 성큼 강물은 떠나리라 시도 사랑과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 보아라 해는 저물어가도 끝없이 영차영차 뒤이어 와 기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내 갈대로 서서 바라보아도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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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 여자//
내가 사는 남쪽 나라 쓸쓸한 눈 내리면, 미군 없는 청진항에서 헌 자전거 한 대 빌어 타고 퍼붓는 눈발을 따라가서 어둠을 털어 내는 전등을 밝힌 집 백설기 같은 김이 하얗게 서린 유리문 열고 들어서면 갈탄 난로가 뜨거운 집 이름도 버리고 돈도 없이 왔노라고 내가 등 푸른 한 마리 정어리로 당신과 헤엄치고 싶다 말하면 동해 같은 자궁을 열어주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청진 여자, 그녀와 하룻밤 자고 싶다 봄에 눈이 온다는 물 맑은 청진항 부근에서 꿈의 벌레 같은 눈송이들이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적시는 밤 아내를 남쪽에 두고 나는 죄짓는 마음도 모르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미역냄새를 맡으면 부끄럼 없이 굵어지는 어깨와 팔뚝 한반도의 허리를 꼭 껴안듯이 더 깊은 신천지 속으로 힘차게 나를 밀어 넣으면 온 바다로 파도 치는 청진 여자, 그녀와 하룻밤 자고 싶다 내가 사는 남쪽 나라 쓸쓸한 눈 내리면, 모든 것을 다 주어야 비로소 하나 되는 날 그 설레이는 첫새벽에 동해 붉은 해 같은 아이를 낳아 넘치는 젖을 물리게 될 청진 여자여, 우리는 간섭받지 않는 부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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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밥//
동트기 전에 죽은 듯이 누웠다가 문득 벌떡 일어나 먹는 밥 지난밤보다 더 큰 밤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 밥을 먹는다 새벽밥이여
혼자 먹는 밥 숨죽이며 먹는 밥 분명히 떠나 갈 사람이 먹는 밥이여 몸서리치며 먹는 밥이여
남몰래 신새벽에 그대 왜 홀연히 깨어 앉아 식구 없는 밥상을 앞에 하는가 따스함이랑 그리움이랑 기꺼이 눌러 죽이고 맨손으로 가자 돌아올 길을 생각하지 말자 끝내 닿아야 할 나라로 가는 아직은 춥고 어두운 길을 보는가
눈물도 없이 먹는다 새벽밥이여
조선 천지 이 집 저 집 벌떡 벌떡 일어나서 한 등씩 불 밝히고 밥 먹는 사람이여 그대 가르고 갈 바람 속에 놓인 시퍼런 한 그릇 밥 새벽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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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논//
아버지 아버지의 논이 비었습니다 저는 추운 書生이 되어 돌아와 요렇게 엎드려 빈 논, 두려워 나가 보지도 못하고 껴안지는 더욱 못하고 쓸쓸한 한 편 시를 써 보려고 합니다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참나무 가시나무 마른 억새풀 아궁이 가득 지펴 펄펄 끓는 쇠죽솥 쇠죽솥 같은 앞가슴 아직도 만들지 못하여서요, 저 죽은 논에 까무잡잡 살 없는 논에 물줄기도 비켜 가지 않게 불러들이고 그 흙물에 서늘히 발목을 적시고 눈 닿는 곳이 다 내 하늘이라 아버지 뼈가 이룬 몸 하나로 버티며 서 계셔도 아, 바로 아버지가 하늘이었지요 그때야말로 가난이 넉넉한 재산이었지요 오늘밤 아버지의 논에 누운 살얼음을 밟고 달이 둥실 뜨는 것을 아시는지요 달빛을 따라 이 궁핍한 밤에도 삽을 들고 성큼 성큼 논으로 나가시는 아버지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바지 활활 걷어 부치고 역사의 논물에 발을 담는 것도 거머리가 붙으면 이놈의 거머리 하며 철썩 젖은 종아리 아무 일 아닌 듯 때리는 것도 저는 겁나는 일이기만 한데 세상의 어둠 다 몰려와 난리를 치는 빈 논에 아버지 돌아오셨군요 아버지의 논바닥 저 깊은 곳에서 겨울에도 푸른 모들은 힘차게 꼼틀거린다고 제가 쓰는 시 이 부족한 은유로는 당신의 삶 끄트머리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압니다 아버지 꿈에도 논에는 나오지 마라 하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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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국민학교//
고 계집애 덧니 난 고 계집애랑
나랑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목조건물 삐걱이는 풍금소리에 감겨 자주 울던 아이들
장래에 대통령 되고 싶어하던 그 아이들은
키가 자랄수록 젖은 나무그늘을 찾아다니며 앉아 놀았지만
교실 앞 해바라기들은 가을이 되면 저마다 하나씩의 태양을 품고
불타 올랐다 운동장 중간에 일본놈이 심어 놓고 갔다는
성적표만한 낙엽들을 내뱉던 플라타너스 세 그루
청소시간이면 나는 자주 나뭇잎 뒷면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
매일 밤마다 밀린 숙제가 잠 끝까지 따라 들어오곤 하였다
붉은 리트머스 종이 위로 가을이 한창 물들어갈 무렵
내 소풍날은 김밥이 터지고 운동회날은 물통이 새고
그래 그날 주먹 같은 모래주머니 마구 던져대던 폭죽 터뜨리기
아아 그때부터였다 청군 백군 서로 갈라져
지금에 이르고 감추어 둔 비둘기와 오색 종이 가루를 찾기 위하여
우리가 저 높은 곳으로 돌멩이 같은 것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그런데 소식도 없이 기러기 기러기는 하늘에다 길을 내고
겨울이 오면 아이들은 변방으로 위문편지를 쓰다가
책상 위에 연필 깎는 칼로 휴전선을 그었다
그 부끄러운 흔적 지우지 못하고 6학년이 되었을 때
가슴속 따뜻한 고향을 조금씩 벗겨내며 처음으로
나는 도시로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고 계집애
고 계집애는 실처럼 자꾸 나를 휘감아 왔다
洛東江,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洛東江//
저물녘 나는 洛東江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木船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銀魚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洛東江,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