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가을,겨울 時

설경 시 11편

머루랑 2010. 1. 27. 13:50

                          <겨울나무/ 이재무, 눈의 나라/ 고은영, 눈 오는 날의 편지/ 유안진, 설경/ 맹위식, 나목의 노래/ 반기룡, 

                                  눈밭에 서서/ 이향아, 그리움/ 이용악, 눈발/ 정호승, 얼음 날개/ 백무산, 설경/ 이향아>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이제는 보이는 구나~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 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단단한 겨울나무

 

<겨울나무/ 이재무>

 

 

 

 

 느티나무 마른 잎새에 소복이 설화가 피고 말들이 눈이 되어 하루종일 하염없이 내린다~

 

 

흰 추위가 닥쳤다

느티나무 마른 잎새에 소복이 설화가 피고

고립이라는 말들이 무수히 창공에서

포슬 눈이 되어 하루종일 하염없이 내린다


겨울이 깊어진 자락에서

사람들은 싸리비로 눈을 쓸고

나는 똥개 마냥 설레는 가슴으로

창가에서 내내 어쩔 줄 모르다

가난한 온정의 들창으로

해 떨어지는 곳을 향하여

가슴에 따듯한 촛불을 밝히고

언 몸 녹이는 남루한 창가


까마득한 신화를 읽어가는 지금은

커피가 식어가고

어두워지면서 대지는 가슴을 닫고

하늘은 하얀 문패 하나 내어 걸었다


 "설국"

 

<눈의 나라/ (宵火)고은영>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한 영혼에 사무쳐

오래오래 메아리치도록

진달래 꽃빛깔로

송두리째 물들이며

사로잡고 싶었던

한 마음이여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며 울림하며

차가운 눈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외침을 보았느냐.

 

<눈 오는 날의 편지/ 유안진>

 

 

 

 

 온 산야 펼쳐 놓은 은세계 눈이 시리도록…

 

 

 

  온 산야 펼쳐 놓은 은세계

눈이 시리도록…

먼 산허리를 아련히 감싸고 있는

뽀오얀 안개구름 위로

두둥실 떠 있는 백설의 산

 


나무들은 어깨마다

지구의 무게를 느낀다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생활의 살점들

 


세상은 평화 속에 잠이 들고

모든 걸 덮어 버렸다

미움도 불신도

추하고 더러운 것도

무수한 세상의 욕망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하얗게 펼쳐 놓은

화선지 위로

작은 새 한 마리

포르르 선을 긋는다.

 

<설경(雪景) / 명위식>

 

 

 

  앙상한 가지마다 소복소복 쌓이는 하얀 힘줄!

 


앙상한 가지마다

소복소복 쌓이는 하얀 힘줄

 


소나무에 붙은 관솔이

힘껏 눈 부릅뜨면

아랫목처럼 따스해지고

 


얄팍해진 몸에

살가운 눈옷을 입혀주면

이불처럼 느껴지는지

스르륵 스르륵

조용히 밤을 굽는다

 


휘어진 겨울 햇살이

다가서면 움찔 놀라며

부스스 고개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무여

 


푸른 옷 입을

봄날 기다리며

긴 겨울을 무던히 이겨내고

더욱 내밀성을 기르려는 듯

동안거에 들었구나

 

 

<나목(裸木)의 노래/ 반기룡>

 

 

 

 

 벌판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눈은 여간해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벌판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눈은 여간해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흐느낌으로 세상을 파묻는다

 


우리도 나중에는 하얗게 될 것이다

하얗게 되어서 서늘히 식을 것이다

불길이 꽃밭처럼 이글거리다가

그을린 삭정이 검푸른 연기까지

끝내는 흰 재로 삭아내리 듯이

우리도 나중에는 하얗게 될 것이다

 

 

햇발 아래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과

이별을 흔들던 진아사 손수건

항복을 알리는 창백한 깃발과

핏기 없이 죽어가는 마지막 얼굴

눈은 자꾸만 오고

세상은 자꾸만 파묻히고 있다

 


지금은 찬연하여도

희게희게 바래서 몰라보게 되면

비로소 끝이라는 걸 믿어도 될까

눈 덮인 벌판을 바라보면

이미 심판이 끝난 것들이

눈발 되어 차분히 내린다는 것을

황홀한 꿈에 잠긴 영혼들의 세상을

아주 가까이서 엿볼 수가 있다

 

<눈밭에 서서/ 이향아>

 

 

 

 세상은 평화 속에 고요히 잠이 들고 모든 걸 덮어 버렸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그리움/ 이용악>

 

 

 

  날은 흐리고 약속도 없이 별들은 이미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날은 흐리고 우리들 인생은 음산하다

북풍은 어둠 속에서만 불어오고

새벽이 오기 전에 낙엽은 떨어진다

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가는 자여

다시 날은 흐르고

낙엽은 떨어지고

사람마다 가슴은 무덤이 되어

희망에는 혁명이

절망에는 눈물이 필요한 것인가

오늘도 이 땅에 엎드려 거리낌이 없기를

다시 날은 흐리고 약속도 없이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눈발/ 정호승>

 

 

 

 

 

 눈발은 굵어지고 둥지위에 쌓이네! 그 보드라운 가슴 깃털 대신 흰눈에 덮여~

  

눈에 젖은 좁은 산길 넘네

마른 솔잎 지고 언 땅 오도독 오도독 밟히는 길

길가 느릅나무 가지에 매달린 새둥지 하나 보네

잎들 저버려 휑하니 드러난 다섯 개의 알들

오돌오돌 떨며 눈을 맞고 있네

어미는 돌아오지 않고

계절은 이미 지났는데

 

(중략)

 

눈발은 굵어지고 둥지위에 쌓이네

그 보드라운 가슴 깃털 대신 흰눈 덮여

눈의 체온으로 알을 부화하네

얼음처럼 빛나는 날개를 달고

먼 겨울 하늘을 건너갈 것이네

 

<얼음 날개/ 백무산> 

 

 

 

 호사스런 것은 사양했는데 비어 있는 뜨락에 메밀꽃 같은 눈이 내리네!!

 

 

 

 

 


축제의 날 정한 묵념의 행렬에 끼어

흐르는 깃발같이 음율 같이


소리하지 못한 우리들의 언어가

저리 풍성한 은혜로 오는가

한 번쯤 분출을 기도하던 하늘이

상벌을 베푸는 것인가

 


황홀히 울먹이는 휘장 속

사람보다 포근한 온기여

 


사철 고슴도치 같은 일과표 속

나는 연지를 바르고 섰다


 <설경(雪景)/ 이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