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그곳에 가면

화살이 날아와 꽂힌 살곶이

머루랑 2011. 3. 19. 15:08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 보이는 중랑천과 청계천이 서로만나는 곳에

        잠수교처럼 보이는 돌로 만든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살곶이다리 이다. 

 

        이 다리는 1972년 까지 일부가 무너진채로 방치되어 있다가 1972년 서울시에서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당초보다 많이 넓어져 버렸기 때문에 다리의 동쪽에

        약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서로 잇대어 연결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기형적인 두 종류의 다리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다.

 

        물론 비용문제나 시간적 제약이 있었겠지만 장기적인 보수계획을 세워서

        기존의 다리와 똑같은 전통제작 방법으로 똑같은 두 개의 돌다리를 놓아 서로 연결하여

        일체감을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이 다리를 한 번이라도 건너본 이들 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점이라 하겠다..

 

 

              △다리위 행인이 지나는 곳 까지가 원래의 살곶이 다리이고 그 앞의 27m는 새로 놓은 다리이다

  

          청계천과 중량천 물이 서로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개울에 있는 살곶이 다리가 위치한 이 지역은 

          하천의 폭이 넓고 풀과 버드나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나라에서 키우는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였다고...

 

        이곳에 다리를 놓게 된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한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겼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과 풍양이 궁에도 수시로 행차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하천을 보다 안전하게 건너 다니기 위하여 이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 박자청으로 하여금 돌다리 세우는 공사를 담당케 하였으나,

         태종은 이 다리의 완공을 끝내 보지는 못하였다.

 

 

              △살곶이다리/ 사적 제 160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지고 또한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의 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가장 긴 살곶이 다리는 600년을 버텨 온 역사가 살아있는 다리이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성종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였다.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여 이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마당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갈수기라 다리 밑으로 내려가 확인할 수가 있었다

 

        다리의 높이는 하상으로부터 10척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4척 가량이다.

         좌우의 교안을 장대석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물밑의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돌기둥들도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든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다리에 사용한 석재들은 모두'큰 혹띠기' 기법으로 바위를 떼어내 표면을 가공하였고

        석재를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공간과 뜬 곳들을 말끔히 메꾸었다.

 

        고종 때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석재가 부족하자 살곶이 다리의 절반을 헐어서

       경복궁을 짓는 석재로 썼다고도 하는데 확인할 근거는 없다고 한다.

 

          △상판석의 재질은 기둥이나 귀틀돌과는 다른 청석을 사용하였다

 

          살곶이 다리의 가장 큰 특징은 장마 때 물이 불어나 다리위로 넘칠 때 물의 저항을 없애기 위해

          다리위에는 난간석을 만들지 않고 매끄럽게 처리한 것이며 물이 줄어들 때는 

         포석면이 밖으로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사적 제160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폭 6m에길이가 78m로 작지 않은 규모이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 남동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세워진 다리로 강릉,충주 등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1420년(세종 2년)에 다리공사를 시작63년 만인1483년(성종 14년)에나 완공 하였으니

         긴 세월 만큼이나 다리 공사에는 사연도 아주 많았던 듯 하다.

        

         이 다리는 현존하는 조선 시대의 돌다리 중 가장 길고 강릉,충주,이천 등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상인이나 백성들이 꼭 건너야 하는 아주 중요한 다리였다.

   

 

 

           다리 보수공사를 하면서 자연스런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석재를 다루는 방법, 즉 돌을 떠어낼 때 시간과 비용이 좀 더 들더라도 옛방식을 따라 

         최대한 자연미가 흘러 나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 

 

         자로 잰듯이 너무나 반듯반듯하게 잘라내어 옛 석재들과 전혀 어울림이 없어 보이고   

         남의 옷을 얻어입은 모습처럼 다리 아래의 풍경은 많이 어색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오갔을까~

 

           600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얼마난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있었는지 

       상판석은 닳고 닳아서 반들반들하다.       

 

        또 눈에 띄는 점은 돌다리를 걷다가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도록 표면에 작은 홈들을 파 놓아서  

       보다 안전하게 거닐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배려를 옛 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가장 긴 살곶이 다리는 600년을 버텨 온 역사가 살아있는 다리이다

     

 

        살곶이다리는 1913년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 하였으며 1925년 서울 지방의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다가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지금의 성동교가 새로 가설되자 이 다리는 70년대 초까지 쓸모없이 방치된 채 있었다.  

 

        화살이 날아와 꽂힌 곳이라 하여 ‘살곶’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으로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을 몹시 미워해 함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중 나온 태종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그 화살이 태종이 쉬고 있던

        그늘막에 꽂혔다는 일화를 간직한 곳이다.

 

 

        화살이 날아와 꽂힌 곳이어서 원래 불리던 제반교(濟盤橋)를 버리고

 

      ‘살곶’이라는 살가운 이름을 얻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