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그곳에 가면

고수레의 유래가 된 김제 성모암

머루랑 2013. 4. 11. 13:10

 

        해마다 그렇듯 올 4월도 예외없이 각종 애경사가 주말,휴일마다 겹쳐 있어서

         봉투들고 쫏아 다니기에도 정신이 없어 산행은 물론 봄이 어떤 모습으로 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네요.

 

         그렇다고 방에 가끔 군불마저 때지 않으면 가끔 찾아 오시는 분들께 죄송할 것 같아

         얼마전 김제 만경읍내 지인의 잔치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며 '고수레'의 유래가 있는  

         김제 성모암에 들렀다 담아온 사진 몇 장 올려봅니다. 

 

 

        △성모암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388번지)

 

       성모암은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유양산 자락에 있는 사찰로 '무자손천년향화지지' 

        (無子孫千年香華之地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천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로 전해오는 

        전라북도 지역의 고승인 진묵대사(震默大師) 모친의 묘소에 세워진 암자를 말한다.

        진묵대사(震默大師)는 조선 중기인 1562년 (명종 17년) 이곳 화포리에서 태어났으며

        대사의 이름은 일옥(一玉)이고 호는 진묵(震默)이다.

 

        태어난 뒤 3년 동안 초목이 말라 시드는 큰 가뭄이 들었으며 비린내 나는 음식과 마늘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 났다." 고 하였다고 전한다.
        7세에 불가에 출가하여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읽었는데

        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 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한다.

 

        봉서사 주지는 어린 진묵에게 조석으로 신중단에 소향예배(燒香禮拜)하는 소임을 맡겼다.
        어느날 신중들이 그 주지 승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들이 어찌 감히 불(佛)의
예를 받겠는가 

        원컨대 다시는 진묵에게 아침 저녁으로 소향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진묵대성사 사리탑

 

        △작지만 깨끗해 보이는 요사채

 

        지방을 여행하면서 발견한 현상인데 나만 그렇데 느꼈는지 모르겠다.

        교통이 불편하고 외진 산골인 강원도나 경상도에 위치한 절집들을 보면 규모가 크고 작음을 떠나

        신도수도 많아 보이고 절집 살림살이도 비교적 넉넉해 보이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데 반해,

 

        교통이 좋고 너른 들녁을 끼고 있는 호남지역에 산재해 있는 사찰들은 하나같이 소박해 보이다 못해

        어떤 곳은 유지도 어려워 보이는 곳이 한 둘이 아닌데 무슨 연유일까~

 

 

        △성모암에는 일주문이 따로 없고 양쪽으로 늘어선 석등길로 대신한다

 

        △성모암경내

 

        △정문에서 5층석탑으로 향하는 바닥에 디딤돌로 깔린 맷돌이 이채롭다 

 

 

 

        △성모암 5층석탑

 

        △탑실 안에 조각된 어린 진묵과 어머니상

 

        △대웅전 전경

 

 

        △극락보전과 약사여래불

 

 

        △조용해서 정감이 가는 경내전경

 

        △극락보전

 

         △산신각

 

        △조용하고 아늑해 보이는 성모암경내

 

        △대웅전

 

         △한반도 모양의 연못 뒤로 나한전이 보인다

 

 

        △작아서 더 좋은 성모암 경내

 

        △고시례전

 

       성모암 고시레전과 고시레의 유래

 

        성모암에는 한글로 쓴 편액이 걸린 고시례전이 있고 진묵대사와 그 어머니 영정이 모셔져 있다.

       김제지역 뿐만 아니라 들이나 산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고시레'라고 외치면서 음식을 던지는 것은

       진묵대사의 어머니 ‘고씨네’ 부인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행위적 의미가 강하다.

 

       원래 고씨 부인 묘가 논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새참을 먹거나 밥을 먹을 때

      “고씨네도 드시오.”하고 밥 한술씩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고시레’의 ‘고시’는 제주고씨인 진묵대사 어머니의 성씨인 ‘고씨(高氏)’에서, ‘레’는 ‘예도 예(禮)’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래에는 이곳이 명당 터로 소문이 나서 많은 어머니들이 순례하면서 ‘고씨네’ 부인을 기념하고 있다.

      ‘고시레’라는 말은 일종의 감탄사 이다.

 

 

 

    고시레유래     

     각 지방마다 유래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거의 들이나 산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준비해간 음식을 조금 떼어서 사방으로 던지며 외치는 소리다.

     고시레를 외치면서 음식 등을 던지는 행위는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풍속 중의 하나다.

 

     이런 행위는 주로 봄철에 모내기를 할 때나 여름철에 김매기를 할 때 주로 행해졌는데

     따라서 벼농사와 관련된 것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고시레라는 말은 주로 벼농사를 하는 지역에서 하던 관습적 행위다.

 

     고대 중국의 하왕조 신농씨시대에 대규모 관개 사업을 할 때 ‘고술해’라고 하는사람이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고시레라는 말은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한

     고술해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나온 관습으로 볼 수도 있다.

 

     충청도 당진의 고씨네 설 : 충청도 당진 땅에 고씨 성을 가진 늙은 홀아비가 살았다.

     가난한 살림에 굶기를 밥 먹듯 했는데 흉년이 든 어느 해에 메말라가는 자신의 논에 물을 퍼올리다가

     힘에 부쳐서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그 마을에 전 서방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논둑에서 새참을 먹으려고 첫 숟가락을 뜨다가

     산허리께로 불쌍하게 죽은 고씨네 무덤이 보이자 고씨네가 불쌍해서

     ‘고씨네’ 하고 이름을 부르며 첫 숟가락의 밥을 무덤을 향해 던졌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전 서방네 농사가 갑절이나 잘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논이나 밭에서 음식을 먹을 때면 먼저 ‘고씨네’하고 첫술을 던졌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모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본떠서 ‘고씨네’ 하는 말을 하면서 음식을 던졌는데 이 말이 변하여 ‘고시레’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진묵대사는 그가 출가하면 대를 이을 손이 끊기며 그의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을 것을 예견하여 풍수설에서 말하는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 =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천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를 유양산 자락에 안장 하였다.  


        이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고 하여 400 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잘 보존 되어 내려오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참배객이 줄을 잇고 있단다.

 

        이 묘소가 퇴락될 즈음 丁巳年(1917년) 5월에 故이순덕화의 현몽에 의하여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소를 알게 되었다 한다.


        부인이 영험의 놀라움에 기의(己疑)하여 묘소에 정성껏 시묘를 하는 동안 지방 유지 및

        인근의 신도들이 진묵대사의 약력과 이순덕화 부인의 공덕 비문을 세우고 묘 아래 재각을 건립하고

        삼존불을 위시하여 진묵대사 모자 분의 영정을 봉안하고 성모암으로 중창했다고 한다.

 

 

 

       △고시례전 앞의 감로수

 

        △물구나무 선 쌍사자석등이 앙증맞다

 

 

         △살이 통통오른 저 청설모도 저녁예불 올리러 왔나?

 

 

       

       토끼만한 저 청솔모는 분명 대웅전에 쌓인 공양미에 관심이 있어서 왔을턴데 

       스님의 눈치만 살피다가 겸언쩍었는지 수도가로 달려가더니 흰둥이가 물을 마시고 간

       물통에서 목만 살짝 축이고 갑니다~ 

 

 

        △다시 성모암을 나서며...

 

 

        △성모암엔 최근에 새 식구가 여덞이나 늘어 났어요

 

 

 

 

        작은 몸으로 모두 여덞마리의 새끼를 낳은 성모암 흰둥이는 젖이 아픈지 배고픈 새끼들이 낑낑대며 

        젖을 달라고 보채도 집에 들어갈 생각을 않고 마루밑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참다못한 한놈이 머리를 내밀고 어미를 부르다가 그만 밖으로 굴러 떨어졌어요.

 

        한뼘 정도밖에 안되는 문턱의 높이지만 이제야 눈을 갓뜬 강아지들에겐 수십길 낭떠러지나 다름 없지요.

 

        우리안을 살피다가 한놈의 코가 깨져서 피가 말라있는 것을 보니 저 녀석도 밖으로 굴러 떨어질 때 코를 다쳤나 봅니다.

        다행히 오늘 밖으로 굴러 떨어진 녀석은 다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어미의 젖냄새를 찾아 품안으로 기어드니

        그제서야 마루밑의 흰둥이가 다리를 들고서 그 새끼에게 젖을 물리네요.

 

        한꺼번에 여덞마리의 새끼들이 달려들어 젖을 빨아대면 젖이 아파서 주지 않으려 하는거 같았어요~ 

 

 

 

 

 

  

     초의(草衣)가 지은 <진묵조사유적고 震默祖師遺蹟攷>에는 모두 18가지 이적(神異)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만 옮겨적어 보면...

 

 

     1. 늙은 어머니를 왜막촌(倭幕村)에서 봉양하고 있을 때 여름 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한 뒤로는 이 촌락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다고 한다.

 

     2.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酒)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는 것이 계행(戒行) 이었는데,

         어느 날 한 중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세 차례나 물었으나 중이 진묵대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모두 술이라고 대답 하였으므로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 중을 바로 타살 하였다.

 

     3. 어느날 진묵대사가 길을 가는데 소년들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끓이고 있으므로 탄식을 하면서

         이 무고한 고기들이 확탕의 고생을 하는구나 하니, 한 소년이 대사를 희롱하여 말하기를

        "스님도 이 물고기가 먹고 싶지 않은가? " 하였다.

 

         이에 대사는 나도 물고기를 아주 잘 먹는다. 하면서 그 물고기를 모두 먹은 뒤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무수한 물고기들이 도로 살아서 헤엄쳐 갔다.

 

      4. 멀리 떨어진 합천 해인사에 화재가 나자 입으로 물을 뿜어서 껐다.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