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그곳에 가면

성묘길에 들른 파주 용암사

머루랑 2012. 10. 4. 08:30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마애석불/보물 제93호>

 

   추석 명절의 혼잡을 피해 부모님 묘소에 미리 성묘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마애석불'이 있는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용암사에 들렀다 왔습니다.  

       하늘은 푸르고 메밀잠자리떼 점점이 하늘에 동그라미 그리던 가을날...

 

       제가 용미리 마애석불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된 동기가 초등학교 3~4학년 때 인가

       충남 논산의 은진미륵과 함께 사회 교과서에 실린 용미리 마애석불의 사진을 보고서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커서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찾아가 보리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동양 최대의 미륵대불이 있는 속리산 법주사가 위치한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법주사 미륵대불을 접하면서 아마 우리고장에 있는 것보다 더 크고 멋있는 미륵불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특이한 형태의 거대한 용미리 마애석불을 보고는

       가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어린 마음에 생겼던 듯 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1993년 5월 초, 온 산천이 하얀 벚꽃으로 수놓던 어느날

 

       마치 운명처럼 그날이 내게 찾아 왔습니다.

       80세를 불과 몇 달 남겨 두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소를 바로 이곳

      '용미리 마애석불'이 비스듬히 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 모셨으니~ 

 

       지금은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앞산의 나무들이 자라면서 시야를 가려

       예전처럼 마애석불 모습이 잘 보이지 않지만...

 

 

 

       △부모님이 쉬고 계시는 곳

 

       전지가위로 나무 하나를 다듬는 데도 노하우가 필요하기 때문에  

       칠남매 4형제 중 막내인 제가 전담으로 주목나무의 전지 및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물론 전공이 조경은 아니지만요~

 

 

        △어느덧 가을도 깊어가고...

 

 

 

       △용암사 경내

 

        △용암사 삼성각

 

 

       △범종각

 

 

 

 

                                          △동자상과 칠층석탑

 

       △동자상

 

       용암사 동자상과 7층석탑에 관한 유래

 

       구전에 의하면 故 이승만대통령 모친께서 용암사 쌍미륵 석불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올린 후

       故 이승만대통령이 탄생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954년 故 이승만대통령 재임시에 용암사를 직접 방문하여 참배하고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이 동자상과 7층석탑을 세웠는데 애초에 이 동자상과 7층석탑은 

        마애석불 좌측의 미륵불상 오른쪽 어깨 옆에, 7층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워져 있었으나

 

        4.19로 인하여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 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 한 후

        재야관련 단체들의 문화재를 훼손 하였다는 비난이 일자 1987년 철거되어 종무소 우측으로

        옮겨 놓았다가 2009년 6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 온 것이라 합니다.   

 

 

 

       △마애석불 오르는 돌계단에서 천 년의 세월이 느껴집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마애석불/보물 제93호>

 

        마애석불은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며 거대한 자연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의 높이는 17.4미터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높이 입니다.

 

        머리 위에 둥근 형태의 돌갓을 올려 놓아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자연적 바위의 제약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몸의 비율이 맞지도 않고 다소 위압적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불상의 형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 입니다.

 

 

 

 

 

  

     □석불입상과 관련된 전설□

 

      고려 중기 13대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李氏)까지 맞이 했으나 여전히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의 꿈속에 어느 날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배가 고프니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꿈에선 깬 궁주는 이 내용을 선종에게 아뢰었고

      왕은 곧 신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름난 석공을 시켜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서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더니 그 해에 원신궁주 에게는 태기가 있었고

      왕자인 한산후(漢山侯)가 탄생 했다고 전해진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마애석불/보물 제93호>

 

 

 

      △거대한 자연 암벽에 자연미를 더해 불상을 조각한 옛사람들의 깊은 혜안에 감탄이...

 

 

        △마애불의 뒷편으로 올라가며...

 

        △뒷면에서 보면 위압적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친근감이 듭니다

 

 

 

        거대한 자연석 바위면의 몸체에 목부분과 얼굴, 머리, 갓, 탑신부 등 모두 5개의 부분을

        따로 조각해 올린 형태로 다소 거칠게도 보이지만 자연미 넘치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고려시대 대표적 마애석불상 입니다.

 

 

       △멀리 북한산 인수봉,백운대,노적봉 등도 보이네요 

 

       △마애불상이 위치한 바위는 한바퀴 돌아 내려올 수도 있어요

 

 

       몸체에 목부분, 얼굴, 머리, 갓, 탑신부 등 모두 5개의 부분을 따로 조각해 올린 형태입니다

 

 

 

        △뒤로 오르면 거대한 바위벽은 간 곳이 없고...

 

      △용미리 마애석불은 파주 십경에도 포함돼 있어요~  

 

      △좌측의 원립불은 남상(男像), 방립불은 여상(女像)으로 불립니다

 

 

       △6.25 전쟁의 상흔으로 곳곳에 총탄 자국으로 파여진 상처가 안쓰럽고...

 

        오른쪽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만 다를 뿐

        신체 다른 부위의 조각수법은 왼쪽의 원립불과 비슷합니다.

 

        구전에 의하면 원립불은 남상(男像), 방립불은 여상(女像)으로 전하고 있는데

        또 불상의 좌측 옆 벽면에는 200여 자에 이르는 명문이 희미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현재는 마멸이 심해서

        판독은 어렵지만 마애불의 전설에 엃힌 구전 내용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좌측 원립불 남상(男像)의 왼쪽 손에는

       돌로 조각된 연꽃이 들려져 있었으나 어찌된 연유인지는 모르나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용암사 마애석불에는 자식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조용히 누워 있는 어미에게 어린 딸이 들꽃을 꺽어다 쥐어 준다.

        어린 딸을 홀로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어미,

        그 어미의 식어가는 가슴에 어린 딸은 슬며시 함께 드러눞는다.

        뼈만 앙상한 어미의 가슴을 만지며 식어가는 어미에게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어 주고 있나 보다.

        강물처럼 출렁이며 아이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으니 나 역시 눈물이 흐른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어미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죽어 누워있는 어미의 가슴팍에 온 몸을 묻고 나란히 누워 있다.

        아버지는 뜰에서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붙잡은 채 쪼그려 앉아 있다.

        이 세상에 남은 가족은 이제 남편과 딸 둘 뿐이다.

 

 

        엄마 이제 그만 보내드리자고,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어린 저 딸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망설이는데,

        새들은 눈치도 없이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 산사의 풍경 소리는

        오늘따라 왜 이리도 청명한 것인지...

 

 

 

        ● 엄마, 엄마~~

            아이는 조그마한 손으로 어미의 가슴을 만지며 흐느꼈다.

 

 

 

        ● 울지마라.

            제발 울지마라, 아가야!

            너는 나의 그림자요, 너는 내 삶의 의미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너는 나의 사랑이란다.  

 

 

 

 

 

        정토마을 능행스님의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에 나오는 대목 이지만

           이와 아주 유사한 안타까운 일이 이번 추석 연휴 중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이웃의 가족에게 닥쳤습니다.  

 

           인연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오듯이

           헤어짐 또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다했기 때문에 떠나가는 것 이라지만 

           삶과 죽음의 이별은 항상 왜 이리도 슬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