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탄 용미리 마애석불/보물 제93호>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며 거대한 자연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의 높이는
17.4미터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높이다.
머리위에 돌갓을 올려 놓아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바위의 제약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몸의 비율이 맞지도 않고 다소 위압적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불상의 형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석불입상과 관련된 전설▣
고려 중기 13대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李氏)까지
맞이 했으나 여전히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의 꿈속에 어느 날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배가 고프니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꿈에선 깬 궁주는 이 내용을 선종에게 아뢰었다.
왕은 곧 신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름난 석공을 시켜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서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더니
그 해에 원신궁주 에게는 태기가 있었고 왕자인 한산후(漢山侯)가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거대한 암벽에 자연스럽게 불상을 조각한 옛사람들의 깊은 혜안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6.25 전쟁의 상흔으로 곳곳에 총탄으로 얼룩져 깨어져 나간 상처가 안쓰럽다>
오른쪽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만 다를 뿐
신체 다른 부위의 조각수법은 왼쪽 불상과 비슷하다.
구전에 의하면 원립불은 남상(男像), 방립불은 여상(女像)으로 전하고 있다.
또 불상의 옆 벽면에는 200여자의 명문이 희미하게 조각돼 있는데 마멸이 심해서 판독은 어렵지만
전설에 엃힌 구전 내용으로 추측한다.
<마애불에는 자식 갖기를 바라는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용암사 앞마당에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젊은 아낙네들의 발길이 잦은 것을 보면 꼭 허무만은 아닌듯...>
<몸체에 목부분, 얼굴, 머리, 갓, 탑신부 등 모두 5개의 부분을 따로 조각해 올린 형태다>
<마애불님은 얼마나 행복 하실까~~ 저 틈새 안에는 石淸이 가득 가득~>
몸체 위에 얹혀진 첫 번째, 목덜미부분 전면 틈새에 꿀벌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연신 벌꿀을 물어 나르느라
초가을 오후가 분주하다. 이 곳 천혜의 요새에 자리를 튼 여왕벌의 혜안이 대단하다.
수 십톤이나 되는 마애불을 해체하기 전에는 영원토록 만수무강 하실테니~♬~
그 안에는 얼마나 넓은 공간이 있는지 궁금하여 굴을 빠져 나오는 일벌에게
살짝 물어 보지만, 붕붕거리는 소리 외에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용암사 미륵불을 마주한 저 명봉산 기슭의 묘지에 뭍힌 고인들은 마애석불에 무슨 염원을 빌고 있을까~~>
<용미리 마애석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명봉산 서울시립 용미리 공원묘지 이다>
거대한 암벽의 몸체에 목부분, 얼굴, 머리, 갓, 탑신부 등 모두 5개의 부분을
따로 조각해 올린 형태로 다소 거칠지만,
자연미 넘치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마애석불상 이다.
<좌측 원립불 남상(男像)의 왼쪽 손에는 돌로 조각된 연꽃이 들려져 있었으나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도 절에 가서 절집만 보고 왔다
요사채 아궁이 동자승이 두드리던 부지깽이만한
말씀 한 토막 못 얻어 왔다.
오늘도 절에 가서
절 뒤의 산줄기만 보고 왔다
오늘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왔다
십 년 넘게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았지만
마음 속 한 치도 못 들어가 본
사람은 더 많았다.
<오늘도 절에 가서/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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