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詩의 오솔길

밥그릇 경전 (이덕규)

머루랑 2009. 3. 14. 16:46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긋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밥그릇 경전/ 이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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