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품송/ 천연기념물 제103호>
이 나무는 수령이 약 800년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오래된 소나무이다. 전해오는 말에 위하면
이 나무는 조선 세조(1455~1468 재위)가 온 몸에 돋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던 중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 임금이 타는 가마인 연이
나무 가지에 걸리어 지나가지 못하게 되자
세조가 '나무에 연 걸린다'고 하자 신기하게도 밑가지가 저럴로 들려져서
그 밑을 통과하게 되었다 한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세조가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의 벼슬을 내렸다 한다.
그로부터 연걸이 소나무, 연송, 정이품송 등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마치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던 나무는
태풍과 폭설, 솔잎흑파리의 피해 등으로 인해 옛모습을 많이 잃은채
근근히 버티고 있어서 안타까운 모습이다.
<법주사 일주문>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시대적용 기타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오리숲의 바깥쪽 산책길>
공원 입구에서 법주사에 이르는 2km의 숲길을 오리숲이라 불리운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우거진 숲길은 햇볕조차 들지않는
오손도손 대화하며 걷기에 그만인 아름다운 길이다.
<수정교 입구의 전나무숲>
초등학교 시절 봄,가을 소풍은 어김없이 법주사였다.
왕복 이 십리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1,2학년은 빠진 전교생이 엄마가 손수 싸주신
김밥을 둘러메고 '막대를 던져 짚고 찾아드는 곳 속리산 법주사여~'로
시작하는 "속리산 찬가"를 합창하며 오리숲을 걷던 추억이 생각나
속으로 읖조리며 잠시 향수에 젖어본다.
<벽암대사비-시도유형문화재 제71호, 비각의 속리산사실기비-시도유형문화재 제167호>
법주사(法住寺) 입구 수정교(水晶橋) 앞에 있는 비로서 비각 안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1666년(현종 7)에 송시열(宋時烈)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속리산은 매우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으며
그 이름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중국 사람들도 한번쯤 구경하기를 원하는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 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4년(1653)에 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금강문과 당간지주>
일주문을 지나 수정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법주사 가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첫 입구가 금강문(金剛門)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돌담이 늘어서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문은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阿金剛力士)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
원통 모양의 기다란 철탑은 당간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찰간(刹竿) 또는 찰주(刹柱)라고도 부른다.
<법주사 전경>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라는 명칭 속에는 부처님의 깊은 법(法)의 정신이 숨겨져 있다.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 천축으로 건너간 의신(義信)은 그곳에서 경전을 얻어 귀국,
나귀에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신라 진흥왕 때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법주사 경내에는 국보 55호 팔상전을 비롯하여 국보 5호 쌍사자석등,
국보 64호 석련지와 보물 15호 사천왕석, 보물 216호 마애여래의상 등이 있으며
원통보전, 세존사리탑, 사천왕문, 희견보살상, 복첨암 수암화상탑,
학조등곡화상탑 등의 많은 지방문화재가 있다.
이 밖에 대웅보전, 일주문, 홍전문, 대종각, 능인전, 석조, 수정암, 중사자암,
여적암, 탈골암, 복천암, 상환암, 상고암 및 여러 대사의 비,
암지 등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다.
<사천왕문/ 시도유형문화재 제46호>
금강문을 통해 깨뜨릴 수 없는 불법의 세계를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대개 사찰의 금강문은 앞면 3칸 정도의 규모인데, 이처럼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법주사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에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는데, 동쪽 세계를 관장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비파를 들고 인간 감정의 기쁨의 세계를 총괄한다.
서쪽 세계를 관장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서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남쪽 세계를 관장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칼을 들고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며, 끝으로 북쪽 세계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 또는 큰 깃대를 들고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한다.
이처럼 인간사를 관장하고 있는 사천왕은 착한 일과 악한 일을
적절한 시기에 판단하여 그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린다고 한다.
어릴적 무서운 형상의 거대한 사천왕상을 보면서 오금을 저리던 생각이 난다.
초등 소풍때 무서움에 떨며 이 곳을 통과하지 못하고 울던 아이도 있었다.
<팔상전/ 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 태어나는 장면,
3)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 시키는 장면,
7)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양 최대의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절 왼편으로 커다랗게 서 있는 이 미륵불은
여러 번 옷을 갈아입은 전력이 있는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다.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다가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80년대 말, 붕괴 직전의 흉한 모습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1989년사월 초파일에 옛 용화보전 자리에 높이 33m의 동양 최대 규모의
청동미륵불이 점안되어 법주사의 새로운 상징물이 되었다.
2000년 들어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주고자,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시작해서
3mm 두께로 미륵불에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의 순금이 들어갔다.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이다.
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다.
윗면에는 역시 팔각의 고임을 나타냈고 다시 그 안에 원형의 고임을 새겼다.
하대석은 한 겹의 커다란 연꽃문양과 그 속에 또 다른 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져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버티어서고 앞발로 상대석을
받치는 모습으로 새겼다.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채
머리가 위로 향한 똑같은 모습이다.
사자의 조각은 매우 정교하여 크고
둥그런 눈, 머리의 갈기, 몸체의 근육 등이 마치 살아 있는 느낌이다.
사자가 받들고 있는 상대석의 아랫 부분은 두 줄의 가는 받침위에
원형에 가까운 앙련석이다. 다시 그 위의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만 장방형의
화창(火窓)을 냈다. 이곳에 구멍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옥개석은 위에서 아래로 약간의 경사를 보이고 추녀 끝에서 반전되었다.
옥개석의 위에는 복련과 공모양의 보주로 장식하였다.
법주사의 역사에 있어서 영심 대사의 중창 이후 즉 8, 9세기의 사정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처럼 뛰어난 석탑이 있어 8세기 번성하던 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 다행이다.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기록과 기단석(基壇石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2층 건물의 구조를 위해 안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였다.
2층에 비해 1층이 높은 편이지만 좌우로 7칸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감안하면
아주 적절한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전라남도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170평에 달하는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삼신불 뒤로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불상과 마찬가지로
각각 독립된 후불탱으로서 1925년 보응(普應)·문성(文性) 스님 등이 그렸다.
비로자나후불탱은 세로 616㎝, 가로 348㎝의 커다란 종이에 족자로 이루어졌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크게 자리 잡고 상단에는 문수·보현보살과
성문중(聲重衆), 하단에는 성중과 동자상을 표현하였다.
좌우의 노사나후불탱과 석가여래후불탱은 규모만 조금 작을 뿐
비로자나후불탱과 흡사하다. 대웅전 오른쪽 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고,
왼쪽 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三藏)탱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끝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옛모습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원통보전/ 보물 제916호>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목조 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361호>
관음보살을 달리 원통대사(圓通大師)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통이란 널리 통하여 두루 막힘이 없는 것, 즉 궁극적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관세음(觀世音)이란 세간의 음성을 관(觀)한다는 의미이다.
즉 사바세계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듣고서
그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보살인 것이다.
관음보살상은 목조로 높이는 280㎝이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보관을 썼다.
그 중앙에는 아미타불의 화불(化佛)을 나타냈으며,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중생의 아픔을 달래 주는 듯하다.
무릎 아래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봉안하였다.
<명부전>
명부세계를 주재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무불(無佛) 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이다.
도리천(쩸利天)에서 머물면서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스스로의 성불마저도 미뤄 둔 대자비의 보살이다.
<약사전>
약사전(藥師殿)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중생의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는 약사불과 후불탱을 봉안하였다. 약사 신앙은 대표적 불보살신앙 가운데 하나다. 동방의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열 두 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다 이루게 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다.
우리 나라의 약사 신앙은 대체로 8세기 이후에 번성하였다. 삼국유사에 약사 신앙의 영험이 많이 전한다.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 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왕의 병을 고쳤고, 통일신라 때 경주에 위치한 신라의 대표적 사찰 중의 하나인 분황사(芬皇寺)에는 거대한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이 있었다.
또한 경주 남산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방불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약사신앙의 대중적 인기를 보여 준다. 법주사에 약사전이 들어선 것은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조선 중기의 가람이나 18세기 중엽의 배치도에도 약사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지금의 원통보전 동쪽 정면에 작은 규모의 약사전이 비로소 등장하였다. 지금의 약사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인데, 안에는 약사여래좌상과 1997년에 조성한 약사후불탱을 봉안하였다. |
<희견보살상/ 보물 제1417호>
청동 미륵대불 오른쪽에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이 서 있다. 흔히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라 부르는 이 보살상은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입상이다.
전체 높이 2m에 이르는 이 보살상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장하는 희견 보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희견 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 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보살상은 하나의 돌로 대좌에서 머리 위의 판석까지를 조각하였고,
맨 위의 향로만이 다른 돌이다. 보살이 밟고 서 있는 대좌는
별다른 조각 없이 판석에 가깝다.
아마도 이 대좌의 반쯤은 땅속에 묻어 고정시켰던 것 같다.
보살상의 상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볼록한 가슴, 굵은 다리와 팔에서 역동적 분위기가 나타난다.
어깨에 두른 겉옷은 팔을 들 때 자연스럽게 펼쳐지듯이 가슴을 활짝 드러내며
옆으로 젖혀졌다.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인다.
두 팔과 머리로 떠받친 그릇받침은 투박한 판석이다.
그 위의 향로는 네 겹의 굵은 연꽃잎을 둘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희견 보살은 단정한 모습에 왼손에는 깃발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이 보살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 존자에 가깝다고 한다.
가섭 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경설을 바탕으로 두고 법주사의 보살상은 희견 보살이 아닌
가섭 존자가 미륵불에게 전할 가사와 발우를 머리에 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명칭은 가섭봉발가사탑(迦葉奉鉢袈裟塔)으로
해야 옳다고 한다. 이러한 이견도 주목할 만하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미륵도량이었고 가람 곳곳에는 미륵불과 관련된
유물이 산재하고 있으므로 미륵신앙을 구현한 가섭존자의
조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석연지/ 국보 제64호>
능인전 앞에 국보 제64호로 지정된 석연지(石蓮池)가 있다.
높이는 200㎝, 전체 둘레는 665㎝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이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에서 연지라고 부른다.
전체 구조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전체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의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이 그것이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의 부재로 사각의 테를 두르고 안에 지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과 우주를 새겼다.
위에는 3단의 층단으로 체감을 줄여 올라 가다가 복련으로 살짝 덮었다.
중대석은 전체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둥글게 피어나는 구름문양이 사방을 감쌌다.
위의 거대한 상대석을 받치기 위해 윗면을 아래보다 넓게 하여 안정감 있어 보인다.
상대석인 연지는 반구형(半球形)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단의 커다란 앙련을 새겼고 다시 그 연꽃 속에는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나타냈다. 연지의 가장 윗부분은 일종의 난간처럼 보인다.
즉 연지 위에 동자 기둥을 세우고 난간이 올라섰는데,
둥근 원형 면마다 천인상(天人像)을 새겼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상단에 놓인 이 난간의 형상으로 미루어
혹 향로(香爐)를 조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한 송이 연꽃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으면서도 섬세하게
조각하여 재질이 화강암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철확/ 보물 제1413호>
이 쇠솥은 높이 120㎝, 지름 270㎝, 두께 10㎝의 거대한 규모로서 철확이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강원 옆 공양간 주위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3,0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일 수 있다고 하는데
가람 곳곳에 있는 거대한 석조물통 및 항아리와 함께 번성했던 법주사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물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주사 석조/ 시도유형문화재 제70호>
3,000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먹을 쌀을 씻는데 사용한
거대한 돌을 사각으로 파낸 석조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옛날에는 승려가 많았던
아주 큰 사찰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추래암>
마애여래의상 우측에 서 있는 마름꼴의 바위로
추래암의 뾰족한 정상에는 약 450년생 소나무 한그루가 멋진 모습으로
70년대 초까지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고사해버려
그 흔적조차 찾을길이 없다.
저 처마아래 공터에는 옛장수들의 복장과 투구, 창과 칼 등을 돈을 받고 빌려주는
장사들이 있었는데, 갑옷을 빌려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등
속리산을 찾은 이들에게 인기있는 장소였다.
<마애여래의상/ 보물 제216호>
전체 높이는 5m로서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치켜 올라간 눈 꼬리, 정면을 향한 도식적 귀, 작은 입과 더불어
군살이 보이는 턱의 모습으로 인해 정교함이 부족하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였고,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않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로부터 어깨·팔·무릎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면적이고 거칠게 조각하였다.
이렇듯 현실성이 부족한 조각이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추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마애여래의상 왼쪽 아래에 2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다.
그 하나는 짐을 싣고 있는 말[馬]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창건주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도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牛]의 모습이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한 소가 진표 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마애여래의상을 비롯해서 이 두 가지 설화를 담고 있는 암각화는
예술적으로는 우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절의 구심점인 미륵불과 창건의 설화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마애여래의상 북쪽 벼랑에는 또 다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대좌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의 모습이다.
왼손에는 지장 보살이 지니는 특유의 여의주가 새겨져 있어 지장 보살로 추정한다.
상호의 표현과 옷자락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마애여래의상과
동시대인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 보살은 지옥세계의 구세주이지만 미륵신앙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석가불과 미륵불의 중계자이기도 하다.
즉 석가불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를 주재하면서
미륵불에게 석가불의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암각의 지장 보살은 바로 마애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표 율사의 수행과정에서 보면 이 마애미륵불과 지장 보살과의
관계는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진표 율사는 혹독한 수행을 통해 지장 보살에게서 인가를 받고 법을 전해 받지만,
스님은 궁극의 뜻이 미륵에 있어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며 수행하였다고 한다.
진표 율사의 경우 신앙의 중심은 지장이 아니라 미륵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수행담이 암각화로 표현되면서 미륵불은 정면에 크게 새기고,
지장보살은 구석에 작게 표현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본다.
'<일상 이야기> > 명사찰,석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보종찰, 조계산 송광사 (0) | 2009.07.03 |
---|---|
오대산 월정사 (0) | 2009.04.24 |
운길산 수종사 (0) | 2009.04.06 |
삼각산 승가사 마애 석가여래좌상 (0) | 2009.03.30 |
4대원찰 北쪽의 삼각산 승가사 (0) | 2009.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