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명사찰,석불

운길산 수종사

머루랑 2009. 4. 6. 12:48

 

 <수종사 미륵불>

 

 

  수종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59년(세조 5) 세조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세조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수로(水路)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양수리(兩水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와 기이하게 여겨 다음날 조사해보니 운길산에

 고찰(古刹)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

 

 그 바위굴 속에서 16나한을 발견했으며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게 되어, 이곳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어 수종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현재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은 그 이전이며 세조연간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뒤 조선 말기에 고종이 풍계(楓溪 : 楓漢)에게 비용을 하사하여 중창하게 했고,

1939년에는 태욱(泰旭)이 중수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년에 주지 장혜광(張慧光)이

 대웅보전 등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나한전·약사전·경학원·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수종사부도내유물(보물 제259호)이 있고, 조선시대 금동불감(金銅佛龕)과 금동불·

보살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수종사다보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이 있다.

 

  

 

 <수종사 일주문>

 

  

 

 

  

 <일주문 천정의 청룡상>

 

 수종사의 일주문, 입구의 미륵불과 불이문은

몇년 전에 새로이 충창한 것들이다.

 

 

  

 

 <부도탑>

 

 

  

 

 

 

<불이문>

 

 국철이 국수역까지 완전 개통되면서 운길산은 그야말로 주말이면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

 

팔당역에서 예봉산을 올라 적갑산,운길산으로 해서 수종사로 내려와

운길산역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제일 인기다.   

 

 

  

 <산신각>

 

 아마도 주말의 북한산이나 도봉산의 많은 인파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운길산으로 

찾아들면서 소문이 나는 바람에 지금은 이곳도 주말이면 넘쳐나는 인파와

 일주문까지 치고 올라오는 승용차들 때문에에 쾌적한 산행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급경사 시멘트포장도로 옆에는 무단 주차한 차량과 매연을 내 뿜으며 힘겹게 고갯길을 오르는

 차량들 때문에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보다는, 능선을 타고 운길산역으로

 빠지는 길이 훨씬 운치도 있고 조용하다.

 

 

 

 

 

 <나한전>

 

 

 

 

 

 <약사전>

 

 

 

 

 

 <수종사 차방>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그 유명한 두물머리 조망은

제대로 느낄 수가 없어서 유감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불머리를 내려다 보며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의 맛 때문에

일부러 수종사를 오르는 이가 많다.

 

조망이 일품인 탁 트인 차방에 앉아 무료로 내어오는 따뜻한 감촉의 찻잔을 부여잡고  

차 맛을 음미하며 명상에 한번 잠기어 보라. 일어서기가 정말로 싫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밖에서 기다리는 다음 사람을 배려해서~~

 

 

  

 

 

 <요사채>

 

 

 

 

 

 <수종사 부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왕명에 의하여 세워진 수종사에 남아 있는 팔각원형부도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는 기단,탑신,지붕이 모두 8각형이고 단층인 부도로 지붕과 기왓골 등 세부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지붕돌 낙수면에 "태종태후정의옹주사리조탑 시주00유씨 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입"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세종 21년(1460) 왕실의 명으로 제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층석탑>

 

 

 

 

 

 <수종사 팔각다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

 

 

 조선 세조 6년(1460)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이 탑은 현재 대웅전 옆에 있지만 원래는 경내에서

동쪽으로 벗어난 곳에 있었다. 기단으로부터 탑신에 이르기까지 팔각형의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기대석과 기단의 각면에는 직사각형 틀안에 안상이 새겨져 있다.

 

3차례에 걸쳐 이전과 해체,복원 되었는데 그 때마다 많은 사리구가 출토 되었다.

1939년에는 사리장치인 고려 청자 안에서 금동구층탑,은제육각감이 각 1점씩 나와 보물 제259호로 지정 되었다.

 1957년 과 1970년 탑을 다시 얿겨 세우는 과정에서 모두 18구의 불상이 발견 되었다.

 

고려 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팔각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석탑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당시 한강을 통한 문화 전파 경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탑내에서 출토된 불상 등 관련자료를 볼 때, 이 석탑은 조선 성종 23년(1493)을 건립

하한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후 조선 인조6년(1628)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전경>

 

 

 

 

 

 <수종사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양수리 두물머리와 양수대교 전경>

 

이 곳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안개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부근의 운해가 최고여서

 먼동이 트기 전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삼각대를 세워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사진작가와 사진동우회로 항상 북적인다.

 

 

 

 

 

 <수종사 은행나무/ 수령 약600년>

 

 은행나무 좌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예봉산 정상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이 채 안걸리는 거리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조망하며 오르는 길에는 군데군데 피어난 진달래꽃이 반겨이 맞아주고,

 

 우측 아래로는 송촌리에서 먹치고개를 힘겹게 넘는 승용차가

드문드문 보이는 한가롭고 정겨운 길이다. 

 

 

 

 

 

 

 

 

 

 

 600여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수종사 은행나무는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기운이 있다고 한다.

 

두 팔을 벌려 은행나무를 감싸안고 지성으로 기도를 하면, 한가지 원은 꼭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항상  많은 이들이 즐겨찾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