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서문전경>
남한산성은 온조 14년 (BC 5)에 하남 위례성에서 천도해온 이후 신라 문무왕 12년(AD 672) 토성(주장성,
일장성이라 칭함)으로 축성하였고,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후금의 침임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 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이괄의 난을 격고난 후 인조 2년(1624)에 재 시작하여 인조 4년(1626)에 준공하였다. |
남한산성 걷기는 서문에서 시작하여 수어장대~남문~남옹성~동문~ 벌봉암문~동장대지~북문~연주봉 옹성~서문에 다시 이르는 8km의 성벽 둘레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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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전경>
노송이 우거진 산성길은 가족과함께 걷기에 아주 좋은 환상의 코스이다
솔숲에서 나오는 송진냄새가 향긋하다
이 성벽 안쪽뿐만 아니라 바깥쪽에도 성벽을 따라 산책길이 나있다
성벽과 함께 오랜세월을 살아왔을 소나무가 많아 산성길이 더욱 운치가 있다
<수어장대 아래의 암문>
성벽을 따라 걷다가 암문이 나오면 밖으로 나가 걷다가
또 다른 암문이 나오면 다시 들어와서 안쪽으로 걸어도 되고 급할 것 없는 천천히걷기~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는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수어장대에서 남문 내려가는 성벽길이 한가롭다
<남문전경>
옛적에는 남문아래로 차량이 다녔는데 지금은 수어장대쪽 산허리로 터널을 뚫어서 차량이 이 곳으로는 다니지 않아
한결 조용하고 공기도 많이 맑아졌다. 남문옆 잣나무 숲속에는 돗자리를 껄아놓고 낮잠을 자거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는 명소다.
<제3 남옹성>
남문을지나 제1옹성부터 제2, 제3옹성에 이르는 성벽길은 현재 보수공사 중인 곳이 몇군데 있어서 완료되지 않은
구간에서는 숲길로 난 우회길로 우회하여 내려오면 된다.
보수공사를 끝낸 제2옹성에서 동문으로 내려가는 성벽길이 시원하다
<시구문>
동문 맡은편 수문가기 전에 있는 이 시구문은 신유년(1801), 기해년(1839), 병인년(1866년)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한덕윤(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로) 등 300여의 시신이 죽임을 당한 후 시구문 밖으로 버려졌던 곳이다.
<남한산성 동문>
조선시대에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려고 쌓은 남쪽의 방어 산성이다.
남한산성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려우나 성 내부에는 경사가 완만하여
10여석의 벼를 파종할 수 있을 정도의 논이 있었고, 풍부한 수량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왕도였다는 견해도 있으나,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쌓은 주장성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려 시대에도 이 성에서 몽고군의 침입을 피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사용되었던 기록이 있다. 인조반정 이후 후금의 칩입에 대비하여 인조 4년에 완공되었고
이 후 150년 간 10여 차례에 걸쳐 다시 고쳐 쌓았다.
성의 둘레는 7,545m 이고 높이는 낮은 곳이 3m 정도이고 높은 곳이 7m 내외나 된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동문전경>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한남루를 세우고 1642년에 세운 객관인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년)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을 비롯하여,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단, 여단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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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지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 항단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
동문에서 장경사를 지나 벌봉으로 오르는 성벽길은 순하여 온 가족이 손잡고 걷기에 좋다
<벌봉의 암문>
저 암문을 나서면 능선을 따라 하남시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부근으로 쭉 이어진다
암문을 나서서 뒤돌아본 모습
벌봉의 암문을 나서서 약7km에 이르는 이 고운 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면 하남시 천현동으로 내려가는데
우거진 숲속길은 햇볕이 전혀 들지않는 아주멋진 숲길이다.
찾는 이들도 별로없어 평소에도 방해받지 않고 걷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그러나 산성길을 걸으려면 이 곳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
<동장대가기 전의 암문>↑↓
8km에 달하는 성벽길은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거리다
오랜세월 탓에 성벽 바위틈새에 잡나무와 풀들이 자라나서
성벽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곳이다.
<동장대 암문>
동장대지는 동쪽 내성의 가장 높은 곳, 즉 한봉외성으로 나가는 암문의 우측 언덕에 있는 건물 터로 해발 501m 지점에 위치한다.
동장대는 인조 2년(1624) 산성수축시 동장대가 설치되고 누각이 함께 건축되었다.
이곳에는 동서 21m, 남북 17m 정도 규모의 평탄지가 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초석이 남아 있고
성벽 아랫길도 북문을 거쳐서 서문 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멋드러지게 새롭게 단장한 북문모습>
왠일인지 최근에 다시 가림막으로 전체를 차단한채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좌측 아래의 우회길로 내려가야 한다.
북문의 처마 단청의 문양이 참으로 곱다. 우리 문화재만이 간직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남한산성은 내부는 완만한데 반하여 외부는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어서 방어하기에는 아주 그만인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걷다가 힘들면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면 되고~
<연주봉 옹성>
옹성 암문을 나서면 연주봉 옹성으로 연결이 되는데, 옹성 망루에 올랐다 구경을 한 다음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연결되는 길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저 성벽을 타고 넘는데, 입구에
등산로로 연결되는 길이 없다는 안내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천동방면(성불사쪽) 등산로로 내려서면서 올려다 본 연주봉 옹성의
둥근포대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우리 민족의 힘찬 기상이 느껴지는 듯 하다.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산성 성벽길이 참으로 좋다
▣남한산성의 설화▣
남문 근처에는 1986년 말에 복원된 개원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옛날부터 불경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한번에 아주 많은 양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무게가 200근이 넘는 큰 놋동 4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서는 귀중한 불경 궤짝을보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신기하다.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한 척의 배가 서울 삼개 나루에 닿았다.
그런데 그 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다만 불경을 담는 궤짝만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궤짝 위에는 '중원개원사간'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이를 발견한 삼개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고, 그 궤짝을 관가로 보냈다.
그리고 관가에서는 이를 다시 왕에게 올렸다.삼개에서 보내온 궤짝과 그 사연을 들은 인조는
"사람도 하나 없는 배가 삼개에 이른 것만 해도 정말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불경 궤짝이 중원의 개원사에서 판각하고 찍은 것이라니,
이는 반드시 인연이 있어 우리 나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우리 나라에 개원사라 불리는 절이 있는 지를 알아보도록 하라.
내가 보기에는 불경 궤짝 위에 쓰여진 글로 보아, 그 불경 궤짝을 우리 나라의 개원사에 보내
길이 보관하라는 뜻인 것 같다. 서둘러 개원사라는 절을 찾아보시오."라고 분부하였다.
이에 개원사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절을 찾아보니,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었다.
그래서 인조는 그 불경 궤짝을 귀중하게 잘 싸서 남한산성의 개원사로 보냈다.
불경 궤짝은 한동안 별 탈없이 잘 보관되었다.
그런데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개원사에 불이 나게 되었다.
절의 화약고에서 불이 일어나 절 전체가 타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의 반대편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일순간에 불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후에 다시 한 번 큰불이 나서 불길이 그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누각에까지 번진 적도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더니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불경 궤짝을 보관하던 누각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차례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은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는 개원사를
부처님의 덕을 보고 있는 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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