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굴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지역에 따라 많은 양의 장맛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없이 북한산을
산행하기로 합니다. 50~100mm 정도의 다소많은 비가 내린다는 중계청(?)의 예보는 참고로 하고 우장 등
을 챙겨서 배낭에 넣고서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오늘은 실황 중계청의 예보대로 북한산에 많은량의 폭우가 내려주기를 기대하면서...
비내리는 날, 그것도 폭우가 내리는 날의 우중산행의 맛은 아주 남달라서 한번 빠지면 좀처럼 빠져나오
기가 쉽지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북한산이라 조금은 염려가 되고 특히 봉우리 근처
에서 낙뢰라도 발생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상황을 보아가며 진행하기로 합니다.
△지하철 3호선 독바위역에서 불광지킴터로 오르니 서쪽에서 비구름이 거세게 달려옵니다
△돼지머리바위
돼지머리는 이미 저렇게 준비되어 있으니 저 바위 아래에 자리를 펴고 떡과 과일, 막걸리 한병만 놓으면
시산제 준비는 끝난 것이죠~
△너구리바위
커다란 신갈나무 아래 자리를 잡은 너구리는 비가 내리는 것도 아랑곳 없이 낮잠에 빠져 꿈을 꾸는지 빙그레 웃는 모습입니다.
△그 좋은 땅을 마다하고 암릉의 작은 구멍안에 터전을 잡은 저 식물의 생명력...고사리풀은 평화를 상징 한다고 합니다
△잠자는 강아지바위
비오는 날은 동물둘도 낮잠을 즐기는지 돼지바위,너구리바위 등 만나는 바위마다 모두 낮잠에 빠진 모습들 입니다.
왜 바위라고 피곤하지 않겠어요? 허구한 날 산을 오르내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다 보면 쉬고 싶은 날도 있겠지요~ㅎ
△족도리봉위에 구름이 걸리고 있습니다
△매끈한 암반위로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는 본격적인 폭우가 내리면 거센 물보라로 변하겠죠~
△굴러 떨어진 사모바위
미끄러운 바위길을 걷던 선비가 그만 발을 헛디디면서 넘어질 때 벗겨진 사모가 계곡아래 숲가에 굴러 떨어져 있습니다.
△향로봉도 비구름에 덮히고 있습니다
△북한산 칠지송
△칠지송
일곱 개의 가지가 뻣친 칠지송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여도 일곱 개의 福을 가져다 준다고 하여 옛부터 매우
귀하게 여기는 소나무 입니다. 가지가 여덞 개인 팔지송도 있고 가지가 더 많은 소나무도 있지만 딱 일곱 개인 소나무는
그리 흔하지가 않지요. 안전산행을 빌어 봅니다.
△계곡 건너편 맨위의 암봉중턱에 김신조굴이 있는데 이때 까지는 굴쪽으로 갈 생각은 없었지요
△암릉 슬랩지역에 오니 천둥번개가 치며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져 내립니다
△바위 구멍의 어린 소나무 한그루
△장마는 원추리꽃과 함께와서 하늘말나리꽃과 함께 끝이 납니다
△멀리 서쪽에서 또다른 비구름이 몰려오는게 보입니다
△시내의 높은 빌딩군들도 비구름에 하나 둘 뭍혀갑니다
△잠시 비가 그친 족도리봉 전경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느라 바위에 땀과 손때가 뭍었을 족도리봉 암릉이 폭우에 자동 세척이 되어 말끔합니다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던 폭우가 잠시 그친 사이 간식을 들면서 시시로 변하며 멀리 지나가는 비구름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려 봅니다.
△휴식도 잠시 더 큰 비구름이 산자락을 감으며 몰려오는게 보입니다
△탕춘대 능선너머 멀리 형제봉에도 폭우가 내리는지 가물가물하게 보입니다
△나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내리는 비의 량을 말해주고 있네요~
연화봉, 문수봉을 거쳐서 위문, 하루재까지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 우중산행을 계획하고 왔는데 바로 머리위에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큰 소리로 울어대는 낙뢰는 몸을 움추러들게 만듭니다.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한사람도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고독의 산행... 우거진 참나무 아래서 한참동안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현명하게
하산을 결정합니다.
향로봉 아래 갈림길에서 선린공원지킴터로 내려오니 그렇게 세차게 퍼부어 대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시야가 훤해집니다.
세차게 퍼붓던 비가 그치니 마음이 변합니다. 완전히 그친 비는 아니니지만 비가 뜸할 때 기자촌에서 올라오는 능선을 다시
올라서 김신조굴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여유있게 차를 마시며 내리는 장맛비나 감상 하자고...
△그 작은 인왕산에도 조각구름이 하나 걸려 있어서 웃음이 나네요~
△비가 잠시 그치니 모든 것이 한결 맑아 보입니다
△대기중의 오염물질이 사라진 시내가 시원하게 보이네요
△장마는 장마인가 봅니다. 그친 듯 하던 비구름이 다시 거세게 비를 쏟아붓고 있습니다
△두 줄의 붉은 무늬가 들어간 기암
△백운대와 만경대
남서쪽에서는 비구름이 몰려 오는데 북쪽인 백운대 일원에는 비교적 조용합니다.
시내에서 몰려오는 비구름을 바라보다가 냅다 뛰기 시작합니다. 세찬 비가 쏟아지기 전에 김신조굴에 도달하려면 부지런히
달려 올라가야만 하니까요.
△저 암릉의 중턱에 김신조굴로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경사진 암릉이 비에 젖어 있어서 매우 미끄러워 조심해야 합니다
△미끄러운 암릉길을 조심하여 내려서니 바로 굴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김신조굴/후래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암흑세계 입니다
대낮에도 컴컴한 굴안은 비가 내리는 오늘같은 날에는 더욱이 굴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랜턴을 비추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계입니다. 굴에 당도하니 때 맞춰 천둥번개와 함께 다시 엄청난 량의 폭우가 다시 쏟아져 내립니다.
안전한 굴 안에 당도했으니 이제는 500mm의 폭우가 더 내린다 하여도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컴컴한 동굴 안에서 나만의
멋진 오찬을 즐길 준비를 합니다. 먼저 막걸리를 꺼내어 건너편 향로봉 자락을 바라보고 앉아 한잔을 넘기니 이순간 만은
나랏님이 전혀 부럽지가 않습니다. 굴 밖에는 번개와 함께 천둥까지 몰아치고 으스스한 굴 안의 분위기와 어우러져서 마치
납량시리즈 특집극을 보는 느낌이 납니다~♪♬
△굴에서 밖을 내다 본 모습입니다
이 굴은 원래 일제시대 때 호랑이를 사냥하던 포수들이 묵었던 곳이라 하여 포수굴이라 불리던 것인데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폭파 침투 사건이 있은 다음 부터 김신조굴로 불리게 되었는데 엄격히 말하면 이 굴하고 김신조 하고는 아무
런 관련이 없는데 당연히 이 굴에서 숙영을 했을거라는 뭇사람들의 추측으로 그리 불리게 되었나 봅니다.
◈김신조 침투사건◈
1968년 1월 17일 밤 10시, 북한 124군 소속 31명이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절단하고 남측으로 침투하였다.
기관단총,권총,수류탄,대전차 지뢰 등으로 중무장한 채, 앉은 걸음으로 얼어붙은 고량포 인근의 임진강을 건넌뒤 파평산
(496m)에 이르렀다. 18일 새벽 그들은 경기도 파주 법원리에 위치한 비학산자락 삼봉산(282m)에 도착, 1박을 한다.
낮 12시쯤 나무하러 온 인근 마을에 사는 우철제(당시 12세)씨 등 4명을 억류했다. 공비들은 이들의 처리를 북측에 무전으로
물었으나 돌아온 암호문을 해독할 수 없어 이들을 풀어줬다. 우씨 일행은 곧장 경찰에 신고했고, 군경 비상경계가 내려졌으
며 나중에 해독된 암호문의 내용은 즉시 원대복귀 였다고 한다~ㅎ
△인왕산은 어느새 마련했는지 하얀 구름모자를 쓰고 서 있네요
19일 밤 김신조 일행은 고령산 앵무봉(622m)을 통과, 북한산 어귀에 다다랐다. 북한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빠지는
바로 창릉천이다. 그 너머에 구파발과 송추를 잇는 비포장도로가 있었고 비상경계를 서는 군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1명씩 도로를 건넜다. 한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도에는 없는 진관사였다. 진관사는 60년대 중반에야 재건되기 시작,
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68년에는 진관사가 그들의 침투용 지도에서 누락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당황한 그들은 진관사 근처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밤엔 사모바위를 지났다. 어찌된 일인지 밤새 달렸지만 출발 지점의
코앞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극심한 긴장감과 공포에 탈진한 김신조 일행은 바로 환상방황(環狀彷徨: 혹한과 피로 누적
등 극한 상황에서 판단력이 떨어져 주변을 맴도는 현상)에 빠져 시간을 지체했던 것이다.
△위험 통제구간인 향로봉이 굴밖으로 가까이 올려다 보입니다
21일밤, 공비들은 산행을 포기하고 빠른 길인 도로를 택해 침투하기로 하고 무기를 휴대한 채 사복으로 갈아입고
세검정으로 내려섰다. 상명대 삼거리를 지나 창의문(자하문) 고개에 다다르니 경찰이 검문을 했다. 옥신각신 하다가
종로경찰서장인 최규식이 그들의 총탄에 쓰러졌다.
김신조는 경복고 후문으로 도망쳤다가 세검천에서 잠복했던 군인에게 붙잡히고 총 31명의 공비 중, 30명이 사살됐다.
그리고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는 우이령은 김신조 침투로가 아니다. 김신조 침투사건이 있고나서 필요에 의해서
군경이 통제하고 있을 뿐이다. 후일 김신조는 "노고산(양주) 줄기를 타고 내려왔다"고 말했다.
가장 빠른 길로 가려했기에 굳이 송추에서 도봉산능선,우이령,사모바위 까지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진관사에서 사모바위 까지는 2.5km 인데 무려 25km가 걸리는 우이령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밖을 나서며 바라본 동굴모습
공비들이 우씨 형제에게 발각되지 않고, 또 진관사 계곡에서 환상방황에 빠지지 않고 그들의 임무를 완수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동굴을 나서면 바로 저 경사진 암릉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한시간여 굴에서 보낸 아주 기억에 남을 멋진 휴식을 마치고 굴을 나서니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저 암릉을 조심하여 오릅니다
△바로옆은 이런 벼랑길이라 추락하면 세상과 영영 이별이 됩니다
△공군 전투기 사격장처럼 흙이 드러난 기자촌능선
△그치는 듯 하던 비가 다시 쏟아져 내립니다
굴이 위치한 암봉을 내려오는데 또다시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집니다. 워낙에 가까이서 치는 낙뢰소리에 그만 나도
모르게 자세를 최대한 낮추어 앉습니다~ㅎ
△암릉으로 이뤄진 산이라 등산로를 따라 빗물이 콸콸흘러 내립니다
△멍게를 닳은기암
그냥 넘어가려고 하였는데 아니 되겠습니다. 김신조굴 안에도 새빨간 페인트로 십자가를 양쪽으로 그려 놓은게 있었는데
이 바위에도 보기 흉하게 허옇게 양쪽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이런 개념없는 작자들이 밟고 올라온 길을 같이 걷는다는 자체가
불결하고 길에선 아직도 썩은 냄새가 풍기는 듯 합니다.
컴컴한 굴안을 랜턴을 비추며 살피다가 깜짝 놀랐어요. 검은색인 벽면에 갑자기 나타나는 새빨간 페인트칠 때문에...
△응봉능선 너머에도 폭우가 쏟아지고 있네요
△이 아름다운 모습의 바위에도 어김없이 어느 개념없는 광신도의 짓으로 자연이 보기 흉하게 훼손되어 버렸습니다
△저 기암의 표정도 슬퍼보이지 않나요?
저런 무개념의 광신도들 때문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수많은 신도들을 도매급으로 욕을 먹이는 일인지 저 작자는 아는지...
각자 믿고 따르는 종교는 다르지만, 그 근본은 모두 하나라고 합니다.
저렇게 까지 해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수 천 년, 아니 수 만 년을 내려온 소중한 우리의 금수강산을 오염시
키고서는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겠지만 설사 이룬다 한들 무슨 보람이 있고 무슨 영광이 있을까...
△모처럼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맞은 원추리는 활짝 웃는 모습이네요~♬
△산행객들도 모두 끈긴 산길엔 모처럼 숲속의 나무들도 편안한 휴식시간을 갖습니다
'<山이 좋아서> > 북한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산 (악어능선 악어새) (0) | 2010.08.03 |
---|---|
북한산 (지장암능선) (0) | 2010.07.20 |
북한산 (숨은벽릿지) (0) | 2010.07.07 |
북한산 (낭만길) (0) | 2010.06.03 |
북한산 (무당골) (0) | 2010.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