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나무와 붉은 열매들// 흔들리다// 밤과 고둥// 비가 오려 할 때// 가재미//
개복숭아 나무// 빈집-1// 빈집-2// 태화리 도둑골// 회고적인>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앵두나무와 붉은 벌레들//
앵두나무 가지 위로는 한쪽이 트인 달이 떴다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누구일까
늙은 앵두나무에 이렇게
다투는 허공을 담을 줄 안 이는
코스모스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중심이 흔들린다
흔들리다 //
나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나는 중심
코스모스는 주변
바람이 오고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코스모스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중심이 흔들린다
욕조의 물이 빠지며 줄어들듯
중심은
나로부터 코스모스에게
서서히 넘어간다
나는 주변
코스모스는 중심
나는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는 나를
흔들리며 바라보고 있다
민물처럼 선한 꿈을 꾸는 깊은 밤, 고둥들이 다닥다닥 돌에 올라선다
밤과 고둥//
밤하늘 별들이 떼처럼 많다
고둥들이 푸른 바닥을 움직이어 간다
물이 출렁인다는 뜻일까
딱딱한 등짝이 말랐다 젖었다 한다
민물처럼 선한 꿈을 꾸는 깊은 밤
고둥들이 다닥다닥 돌에 올라선다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철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로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릎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가만히 적셔준다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개복숭아나무//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 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 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빈집-1 //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
발들 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
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 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 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
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 집니다 하지
만 오랜 후에 당신이 돌아 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을 보신다면, 그 안
에 고여 곰팡이 쓴 내 기다림 을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
고 험한 마당 시원하게 쓸어 줄 일입니다.
지붕 위로 기어오르는 넝쿨을 심고 녹이 슨 호미는 닦아서 걸어두겠습니다
빈집-2 //
지붕 위로 기어오르는 넝쿨을 심고 녹이 슨 호미는 닦아서 걸어두겠습니다
육십촉 알전구일랑 바꾸어 끼우고 부질없을망정 불을 기다리렵니다 흙손
으로 무너진 곳 때워보겠습니다 고리 빠진 문도 고쳐보겠습니다
옹이 같았던 사랑은 날 좋은 대패로 밀고 문지방에 백반을 놓아 뱀 넘나들
지 않게 또 깨끗한 달력 그 방 가득 걸어도 좋겠습니다
딱따구리 한마리가 숲에서 목구멍을 치는 소리...
태화리 도둑골//
딱따구리 한마리가 숲에서
목구멍을 치는 소리
먹는 입이 저처럼
활엽수를 쪼는 딱따구리만큼 맑아질 수 있을까
하도 맑아
상처를 잊은 듯
나무의 존재도 오롯하게
허공에 부풀어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저 소 좀 봐~
회고적인//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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