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문태준,윤보영

이외수 시모음(하)

머루랑 2009. 5. 12. 13:28

  <비오는 날 달맞이 꽃에게, 점등인의 노래, 벚꽃, 모월모일, 더 깊은 눈물 속으로, 비에

    관한 명상수첩, 풀꽃, 별, 놀, 초저녁 강가에서>

 

 

 

비오는 날 달맞이 꽃에게/

이 세상 슬픈 작별들은 모두
저문 강에 흐르는 물소리가 되어라
머리 풀고 흐느끼는
갈대밭이 되더라

해체되는 시간 저편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시어들은
무성한 실삼나무 숲이 되어 자라 오르고
목메이던 노래도 지금쯤
젖은 채로 떠돌다 바다에 닿았으리

작별 끝에 비로소 알게 되더라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노래가 되지 않고
더러는 회색하늘에 머물러서
울음이 되더라
범람하는 울음이 되더라
내 영혼을 허물더라

 

 

 

 

 

 

 

점등인의 노래/

이 하룻밤을 살고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헤어진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이 들풀가에서 만나게 하라

바람 부는 눈밭을 홀로 걸어와
희한만 삽질하던
부질없는 생애여
그래도 그리운 사랑 하나 있었더라

밤이면 잠결마다 찾아와 쓰라리게 보고 싶던 그대
살속 깊이 박히는 사금파리도
지나간 한 생애 모진 흔적도
이제는 용서하며 지우게 하라

 

 

 

 

 

 

 벚꽃/


오늘 햇빛 이렇게 화사한 마을

빵 한 조각을 먹는다

아 부끄러워라

나는 왜 사나.

 

 

 

 

 

 

 
 모월모일/

먼 여행에서 돌아온 날
문틈에 시든 꽃 한 송이
물려 있다

그애가 왔다갔구나

 

 

 

 

 

 

 

 더 깊은 눈물 속으로/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비로소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모난 돌들이 보인다
결국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날개 적시며
갈매기 한 마리
지워진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파도는 목놓아 울부짖는데
시간이 거대한 시체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
부끄럽다
나는 왜 하찮은 일에도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져 울고 있었던가

그만 잊어야겠다
지나간 날들은 비록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에는 분명
내가 흘린 눈물도 몇방울
그때의 순순한 아픔 그대로
간직되어 있나니
이런 날은 견딜 수 없는 몸살로
출렁거리나니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우리들의 인연은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죽은 시간이 해체되고 있다
더 깊은 눈물 속으로
더 깊은 눈물 속으로
그대의 모습도 해체되고 있다

 

 

 

 

 

  

비에 관한 명상수첩/

1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흐린 세월 속으로 시간이 매몰된다.
매몰되는 시간 속에서 눈군가 나지막이 울고 있다.
잠결에도 들린다.

2
비가 내리면 불면증이 재발한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이름일수록
종국에는 더욱 선명한 상처로 남게 된다.
비는 서랍 속에 해묵은 일기장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은 아무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되돌아보아도 소급되지 않는다.
시간의 맹점이다.
일체의 교신이 두절되고 재회는 무산된다.
나는 일기장을 태운다.
그러나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3
비는 뼛속을 적신다.
뼈저린 그리움 때문에 죽어간 영혼들은 새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뼈저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까.

4
빗속에서는 시간이 정체된다.
나는 도시를 방황한다.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범람하는 통곡 속에서 해체된다.
폐점시간이 임박한 목로주점.
홀로 마시는 술은 독약처럼 내 영혼을 질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바하의 우울한 첼로를 듣는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날이 새지 않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이 메인다.

5
우리가 못다한 말들이 비가 되어 내린다.
결별 끝에는 언제나 침묵이 남는다.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해도 돌아갈 수 없는 전생.
나는 누구를 사랑했던가.
유배당한 영혼으로 떠도는 세속의 거리에는 예술이 암장되고 신화가 은폐된다.
물안개 자욱한 윤회의 강변 어디쯤에서 아직도 그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쓰라린 기억의 편린들을 간직한 채 그대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야 한다.
세속의 시간은 언제나 사랑의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풀꽃

세상길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도 법문 같은 개소리
몇 마디쯤 던질 줄은 알지만
낯선 시골길
한가로이 걷다 만나는 풀꽃 한 송이
너만 보면 절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렇다면 내 공부는 아직도 멀었다는 뜻

 

 

 

 

 

 

 

별/

내 영혼이 죽은채로 술병 속에
썩고 있을 때
잠들어 이대로 죽고 싶다
울고 있을 때
그대 무심히 초겨울 바람속을 걸어와
별이 되었다

오늘은 서울에 찾아와 하늘을 보니
하늘에는 자욱한 문명의 먼지
내 별이 교신하는 소리 들리지 않고
나는 다만 마음에 점 하나만 찍어 두노니
어느날 하늘 맑은 땅이 있어
문득 하늘을 보면
그 점도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놀/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누군가가 그림자 지는 풍경 속에
배 한 척을 띄우고
복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뼈가루를 뿌리고 있다
살아 있는 날들은
무엇을 증오하고 무엇을 사랑하랴
나도 언젠가는 서산머리 불타는 놀 속에
영혼을 눕히리니
가슴에 못다한 말들이 남아 있어
더러는 저녁강에 잘디잔 물비늘로
되살아나서
안타까이 그대 이름 불러도
알지 못하리
걸음마다 이별이 기다리고
이별 끝에 저 하늘도 놀이 지나니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초저녁 강가에서/

헤어진 사랑
땅에서는 바위틈에 피어나는
한 무더기 꽃
하늘에서는 달이 되고 별이 되고
또 더러는 내 소중한 이의 귀밑머리
거기에 무심히 닿는 바람소리


  

 

 
1946년 경남 함양생.
1972년 춘천교육대학 중퇴.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75년 세대지 신인문학상 수상.
작품집 <꿈꾸는 식물> <들개> <겨울나기> <칼> <사부님 싸부님>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풀꽃 술잔 나비> <벽오금학도> <감성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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