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휴게실>/문태준,윤보영

이외수 시모음(상)

머루랑 2009. 5. 12. 13:56

  <강이 흐르리, 설야, 뜰 앞에 잣나무, 여름 엽서, 섬, 조각잠, 길, 가끔씩 그대 마음이 

   흔들릴 때는,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흐린 세상 건너기> 

 

 

 

강이 흐르리/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되고
오스스 떨며 나서는 거미의 여린 실낱
맺힌 이슬이 되고
그 이슬에 비치는 민들레가 되리라

살아있어 소생하는 모든 것에도
죽어서 멎어 있는 모든 것에도
우리가 불어 넣은 말 한 마디

사랑한다고
비로소 얼음이 풀리면서
건너가는 나룻배
저승에서 이승으로 강이 흐르리

 

 

 

 

 

 

 

 설야/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詩를쓰면
눈이 내린다는 말 한마디

어디선가
나귀등에 몽상의 봇짐을 싣고
나그네 하나 떠나가는지
방울소리
들리는데
창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함박눈만 쌓여라
숨 죽인 새벽 두시

생각 나느니 그리운이여
나는 무슨 이유로
전생의 어느 호젓한 길섶에
그대를 두고 떠나 왔던가

오늘밤엔
기다리며 기다리며
간직해 둔 그대 말씀
자욱한 눈송이로 내리는데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詩를 쓰면
울고 싶다는 말 한 마디

이미 세상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온 한 생애가 부질없구나

하지만 이 時間 누구든 홀로
깨어 있음으로 소중한 이여
보라 그대 외롭고 그립다던 나날 속에
저리도 자욱히 내리는 눈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길 하나
그대 전생까지 닿아 있음을.

 


 

 

 

  

뜰 앞에 잣나무/

결국 나 혼자 가야할 길을
길동무나 있을까 기다려 보았네
어디에 있으나 나는
우주의 중심부
달빛 가득찬 절간이지
복사꽃 만발한 부처님 손바닥
내가 걷는 대로 뚫리는 손금

 

 

 

 

 

 

 

여름 엽서/

오늘같은 날은
문득 사는 일이 별스럽지 않구나
우리는 까닭도 없이
싸우고만 살아왔네
그 동안 하늘 가득 별들이 깔리고
물 소리 저만 혼자 자욱한 밤
깊이 생가지 앓아도 나는
외롭거니 그믐밤에는 더욱 외롭거니
우리가 비록 물 마른 개울가에
달맞이꽃으로 혼자 피어도
사실은 혼자이지 않았음을
오늘 같은 날은 알겠구나

낮잠에서 깨어나
그대 엽서 한 장을 나는 읽노라
사랑이란
저울로도 자로도 잴 수 없는
손바닥 만한 엽서 한 장
그 속에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
말 한 마디만으로도
내 뼛속 가득
떠오르는 해

 

 

 

 

 

 

 

섬/

 

삽작 어귀도 쓸고
댓돌도 쓸고
방 안도 거울처럼
쓸고 닦았다.
벽 속의 달마가 말하기를
웬 쓰레기가
이리 큰 것이 앉았는고. 

 

 

 

 

 

 

 

조각잠/

 

겨울 강바람이
산발치로
산길 몇 개를 틀어올리면.
사람이 그리워
내려오는
산길로 들자.
무엇을 더 끊어야 하리.
세상 밖에 나와서
세상을 보는
저 깊은
적멸.

 

 

 

 

 

 

  

 길/

버리고 일어서라.
시간의 감옥
눈 먼 등대 아래서
살해당한 바다곁에서
누군가
진눈깨비에 뼈를 적시며
울고 있지만
아무리 깊은 어둠
부러진 날개
참혹하여도
버리고 일어서라.

버리고 일어서라.

이 세상 모든 길들은
내게서 떠나가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로 돌아오는 자를 위해서
영원토록
잠들지 않나니...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부는 날에는
바람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리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침묵으로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 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흐린 세상 건너기/

비는 예감을 동반한다.

오늘쯤은 그대를
거리에서라도 우연히
만날는지 모른다는 예감.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엽서 한 장쯤은
받을지 모른다는 예감.

그리운 사람은 그리워하기 때문에
더욱 그리워진다는
사실을 비는 알게 한다.

이것은 낭만이 아니라 아픔이다.

 

 

 

 

 

1946년 경남 함양생.
1972년 춘천교육대학 중퇴.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75년 세대지 신인문학상 수상.
작품집 <꿈꾸는 식물> <들개> <겨울나기> <칼> <사부님 싸부님>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풀꽃 술잔 나비> <벽오금학도> <감성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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